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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Apr 01. 2022

드라마에 진심이었던 격리기간

코로나 확진과 드라마 취향

코로나 증상이 나타난 후 주말 포함 꼬박 9일을 항생제와 진통제를 털어 넣으며 격리기간을 보냈다. 절반으로 나누어 4.5일 정도는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만 있었다. 나머지 4.5일은 약을 먹으면 몸살이 사라져 넋은 돌아와 있었다. 늦은 밤에는 약효가 사라져 조금은 맑아진 정신으로 목 통증과 기침을 견뎌야 했다.


밤에 잠이 깜빡 들었다가 실수로 침을 삼키면 칼날을 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약을 먹어도 증상은 점점 심해져 일어나 앉아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아이 옆에서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다 잠이 와서 잠이 들고, 잠이 들면 목이 끔찍하게 아프고 기침이 났기에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넷플릭스 앱을 열고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보던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괴로운 몸이 집중하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서른아홉>은 보는 내내 울어야 하기에 마음마저 힘들어졌다. 아픈데 눈물까지 나다니 아우 꼴보기 싫은 내 모습. 더욱더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드라마들을 찾기 위해 재생 버튼 클릭을 반복했다.


채택한 드라마들은 깊이 있게 삶을 다루지 않고, 비현실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재벌2세 출연) 감정을 소모할 기운이 없었기에 현실을 떠올리지 않아야 했다. 감정이입하지 않으면서 재미있어야 했다. 그래야 멍하니 다음 회 버튼을 클릭하고, 오프닝 건너뛰기를 클릭하며 1회 2회 3회 진도가 나갔다.


결국 다소 자극적이거나, 유치했다. 안 그래도 아파죽겠는데, 마음이나 뇌를 써야겠니? 단순하고 즐거운 로코(로맨스 코미디)가 제격이었다.


넷플릭스의 <로맨틱한 한국 코미디 시리즈>를 보니 이미 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변혁의 사랑> <뷰티인사이드> <이번 생은 처음이라> <도도솔솔라라솔> <우리, 사랑했을까> <내성적인 보스> <멜로가 체질> <로맨스는 별책부록> <또! 오해영> <별에서 온 그대> <청춘시대> <안녕? 나야!> <갯마을 차차차> <스타트업> <도시남녀의 사랑법> 이 그러하다.




결국 밤새 정주행한 드라마는 <마이리틀베이비> <기상청 사람들> <사내맞선> <결혼작사 이혼작곡> 이다. 이것 외에 보다 만 것도 많다. 조금이라도 보기 짜증 나는 우리네 인생이 보이면 그만 보았다.


증상 7일차 즈음 되자, 드라마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밤새 보았으니 어떤 날은 키스신이랑 베드신을 열 번도 넘게 본 것 같다. 드라마마다 왜 자꾸 그런 게 나오는지. �(내가 고른 드라마지만)


증상 8일차 즈음 되자, 두 눈을 껌벅껌벅하며 드라마를 보는 집중도가 높아졌다. 특정 장면들에서 심장이 나대기 시작했다. 드라마에 몰입이라니, 이제 몸이 좀 나으려는가 안심이 되다가도 미쳤나 싶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두근거려도 되는 건가 부끄럽기도 했다. 드라마 톡 방에 들어가 대중의 반응이 어떠한지 확인했다. "이 드라마를 보고 20대에 뛰던 심장이 40대가 되어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라는 톡을 보고 안심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격리가 해제되고, 출근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한다. 새벽에 기침이 멈추지 않으면 넷플릭스 앱을 열어 시청하던 드라마를 이어 재생한다. 그런데... 설레긴커녕 오그라들기만 할 뿐이다.  심장에게 지난주엔 왜 쿵쾅대며 지랄했냐고 묻고 싶다.  


<사내 맞선 중>

" 내 카드와, 자기에 대한 내 사랑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바로 한도가 없다는 거야. 한도가!"


<결혼작사 이혼작곡>

" 사랑이라고 할 순 없고 온몸에 소름 비슷한 전율인 거예요. 어쨌든 블랙홀처럼 빨려 들었어요."


<기상청 사람들>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나면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이런 대사들에 머리를 기대고, 힘든 새벽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리기를 바라며 버틴 건 사실이니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며칠 차이로 어떻게 같은 드라마를 보며 웃음도 안 나오고,  아무 감흥이 없다니. 심지어 따분하기도 하고, 변태 같아 보이는 등장인물도 눈에 띄고 신경질이 나기도 한다.


출근길에 <사내맞선> OST 스페셜 트랙인 멜로망스의 <사랑인가 봐>를 들었다.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드라마 장면들이 떠올라 곡을 변경했다.


며칠동안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내맡기기 위해 수많은 키스신과 베드신에 의미를 부여하며 일렁일렁했다.


그래, 원래 이렇게 남녀가 꽁냥꽁냥하기만 한 드라마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고. (흥! 토할 거 같아)

로맨스를 좋아하되, <수상한 로맨스>나 <동백꽃필무렵>, <쇼핑왕루이>처럼 누구 하나 죽거나 죽은 것 같은 무시무시한 드라마를 사랑한다. <청춘시대>나 <갯마을차차차>처럼 미스터리하고 우울한 느낌이 가미되어 그 울적함을 즐기던 나였다.




격리기간에 뛴 심장은 드라마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약해진 심장 때문이었나 보다. 코로나로 일상의 루틴을 잃어버리고 만사에 짜증 나는 현재, 드라마 속  남의 인생(더군다나 사랑 따위!!!)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 정말 코로나 완치를 향해 가고 있나 보다. 다른 드라마로 갈아탈 계획이다. 정말 뭐에 홀렸었나 보다. 남자주인공들이 코로나때문에 아파 죽겠는 내 다리 주물러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는지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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