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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TE Feb 09. 2021

살고 싶다는 농담으로부터

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 비평

 삶은 때때로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을 일으킨다. 가령 가까운 이의 죽음이나 마음의 병 따위 말이다. 때로는 억울하다. 내가 당최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악랄한 기억의 조각은 우리의 목덜미를 할퀸다. 우리는 하릴없이 피를 뚝뚝 흘리며 어서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나 또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이다. 그럴 때마다 손목을 긋는 대신 좋은 구절에 밑줄을 그으면서 책을 읽었다. 작년에 발간된 허지웅의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도 그렇게 읽었다. 나는 전에 읽었던 그의 저서에서 느꼈던 염세와 자조 섞인 글들을 기억하며 첫 장을 넘겼다. 어라, 전의 그가 아니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라는 농담처럼 나는 적당한 비관은 인생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고 조금 배신감을 느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그도 퍽 매력 있는 작가였다.


 그는 전작에서 보였던 자조적인 체념에서 더 나아가 담담한 희망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꼈던 이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갈 낙관을 심어준다. 그것이 비록 털어내기 낯부끄럽고 끔찍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그것에 지지 말고 끝끝내 버티고 이겨서 살아가라 말한다. 여타 에세이가 그러하듯, 이 말이 모든 이의 마음에 와 닿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허지웅이 김난도가 되었다고 한다. 살기 힘들지 않을 정도의 재산과 직업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젊은이들에게 근거 없는 낙관과 태평한 위로를 건넨다는 뜻이다.


 오만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보다 불행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생각으로 읽어 내려가던 찰나, 이 구절을 읽었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 때로는 의표를 찌를 때도 있다. 이렇듯 허지웅 작가는 자칫 상투적일 수도 있는 관념을 적확한 언어로 직조해내는 재주가 있다. 그렇기에 그의 책은 막연하지만, 천천히 음미할 만하다. 그가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챕터에서 쓴 구절을 보자.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대학교 1학년을 어영부영 보내고 막 2학년이 되었을 무렵, 대학에서 만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는 삶이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고 느꼈다. 전혀 재미있지 않은 장난 말이다.

 아직 그때의 적막을 기억한다. 그에게 건넸던 어색하고 일방적이었던 대화, 울먹임, 향 냄새, 마른세수. 이 모든 것들이 음소거된 듯 먹먹하게 다가왔다. 위의 구절을 읽으며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계속해서 불행의 원인을 찾으며 과거에 얽매여 있을 때, 작가는 다독였다.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이 말을 머릿속에 되새기니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그렇게 됐다. 수습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있었다. 다음 일을 할 수 있었다.


 작가는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문턱에서 이 끈질긴 고통 속에서도 살고 싶다고 호소한다.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살고 싶다는 역설적인 감정. 이 아모르파티에 그가 느꼈던 번뇌와 상념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느 때처럼 공사다망한 내 인생이 웃기지 않은 농담처럼 느껴질 때면 하릴없이 이 책의 먼지를 털어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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