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발견한 또 다른 신세계
“이소위 님, 점심이나 같이 하실래요?”함께 일하는 하사관 C중사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친구여서 평소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주 나누던 친구였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부대 앞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보통은 동네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한 후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낸다.
“저희 집에 잠시 같이 가실래요?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재미있을 겁니다.”
“집이 어딘데요?”
“용산이니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결국 택시를 타고 용산 끄트머리 한강대교 앞에 내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데이콤 빌딩 뒤편의 허름한 주택가였다. 골목을 몇 번 꺾어 들어가 낡은 단층 주택 문을 열고 그의 자취방에 들어갔다. 평범한 독신 직업군인의 방치고는 깔끔했다. 한쪽 구석에 씌워 놓은 비닐 커버를 벗기니 최신형 386 컴퓨터가 드러났다. 기억대로라면 메모리 2MB에 하드디스크는 20MB였다. 엄청난 사양이었다. 모니터도 사무실과는 차원이 다른 VGA였다. 역시 부팅되는 속도도 엄청 빨랐고, 명령어가 실행되는 속도도 놀랄 정도로 빨랐다. 게다가 마우스라는 신기한 장치가 달려 있었다.
“잠시 기다려 보세요.”
DOS 명령어로 무슨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니 화면 가득 알 수 없는 화면이 나타났다. 마우스를 누르니 음악이 쏟아져 나왔다.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였다. 소름이 끼쳤다. 컴퓨터에서 음악이 나오다니.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오류를 뜻하는 ‘삐~’ 소리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정확한 비트의 드럼과 오르간 소리가 컴퓨터에서 흘러나와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를 흥얼거리게 만들다니. 얼마 전 신해철이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어 발표했다는 소식이 생각났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던 이야기가 내 눈앞에 현실로 펼쳐져 있었다. ‘바로 이거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취미로 기타를 다뤄왔던 내게 컴퓨터와 음악이 만나 스파크를 일으킨 시점이었다. 바로 이래저래 돈을 마련하여 내 컴퓨터를 마련했다. 386SX 컴퓨터에 4MB 메모리, 40MB 하드 디스크, 거의 200만 원이 들어갔다. 다시 말하지만 기가바이트가 아니고 메가바이트다. 물론 그 안에는 애드리브 Adlib이라는 사운드카드도 달려있었다.
한동안 애드리브 카드에서 작동하는 컴포저 Composer라는 프로그램에 빠져 살았다. 퇴근하면 집에서 이 프로그램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기능이었다. 11개의 트랙을 사용할 수 있지만 한 트랙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음은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드럼 같은 리듬파트를 쓰려면 5개 트랙을 할애해야 했다. 멜로디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리듬 4파트 대신 2파트로 줄여서 써야 했다. 결국 완전히 음을 넣을 수 있는 채널은 6 트랙에 불과했다. 베이스 라인 하나, 코드 세 개, 주선율 하나를 넣고 나면 남은 건 단 한 트랙뿐이었다. 그 좁은 터널 속에서 풍성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음표 하나하나를 쪼개고 겹치는 잔재주를 부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온갖 잔재주를 마스터하며 점점 그럴듯한 노래를 만들어 냈다.
이와 함께 사무실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던 모뎀과 이야기 프로그램도 설치했다. 내 방에서는 사무실과 다르게 채팅과 온갖 게시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천리안 사운드카드클럽 Sound Card Club:SCC에서 내가 올린 노래의 순위가 올라가는 걸 보면 흡족했고, 내가 부린 꼼수를 신기해하는 다른 사용자를 볼 때마다 으쓱했다.
이 좋은 걸 나 혼자 즐길 수는 없었다. 당시 여자친구도 꼬셔서 컴퓨터를 장만하도록 했다. 서로 퇴근 후 만나 데이트를 즐기고 나면 집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천리안에서 만나 채팅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얼굴을 맞대고 하는 이야기와는 또 다른 느낌과 재미가 있었다.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다만 ATDT 명령어로 여자친구의 집에 전화를 걸고 나서는 잠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삐~하는 접속음 대신 잔뜩 찌그러진 소리로 “도대체 오밤중에 뭐 하는 놈이냐?”라는 여자친구 아버지의 불호령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올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내 인생에서 군에 가기 전 20년 동안의 시간보다 군에서의 3년이 훨씬 빠르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