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건국 영웅들의 역할
1장: 건국을 위한 정치적 협상과 대립
1. 미소공동위원회와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에 종전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그 기쁨은 곧 두 강대국의 점령으로 인해 양분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남한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고, 소련은 북한 지역에 군정을 시행하면서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체제가 세워졌다. 그동안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된 한국인들은 자유와 독립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국제적 논의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본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이 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은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반도의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 공동위원회는 한국 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과 협력하여 통일된 임시 정부를 세우고, 그 후 5년 동안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신탁통치 방안은 한국 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우익 세력은 이를 "또 다른 외세의 지배"로 간주하며 강력히 반대했다.
1946년 3월, 첫 번째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한국의 정치 세력들이 참여하여 임시 정부 수립을 논의할 수 있도록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미소 양측은 한국 내 정치 단체를 승인하는 문제에서부터 심각한 대립을 겪었다. 소련은 친소적 성향의 좌익 단체만을 인정하려 했고, 미국은 모든 정치 세력, 특히 우익 단체들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입장 차이로 인해 첫 번째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한반도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이후, 한반도 문제는 점점 더 국제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여 해결하려는 방안을 추진했고, 이에 따라 1947년 유엔은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통해 통일된 정부를 세우자는 결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 유엔의 결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에서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곧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로 이어졌고, 한반도의 분단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2.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논의와 갈등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는 한반도의 정치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제 한반도의 운명은 더 이상 한민족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이념적 갈등 속에서 좌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승만은 일찍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1947년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에서 먼저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라고 공언하며,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한 단독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입장은 남한 내 우익 세력의 지지를 얻었지만, 좌익 세력과 중도파, 그리고 통일 정부 수립을 원했던 인물들로부터는 강한 반발을 샀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구와 김규식이었다. 김구는 민족주의자로서 한반도의 통일과 자주독립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는 남북 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 북한으로의 협상을 시도했고, 김규식 역시 이러한 노선에 동참했다.
1948년, 남북 간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유엔은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길이 열렸고,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첫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좌익 세력과 일부 중도파 인사들은 총선거를 거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끝까지 남북 협상을 주장했다. 북한 역시 이 선거를 불법으로 규정하며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단독정부 수립이 이루어졌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이로써 남한은 공식적으로 독립된 정부를 가지게 되었으나, 이는 곧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북한에서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한반도는 두 개의 정부로 나뉘게 되었다.
3. 좌우 합작 위원회의 실패와 남북의 분열
한반도 내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해방 직후부터 극심했으나, 일각에서는 이를 극복하고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좌우 합작의 시도가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좌우 합작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 세력 간의 협력을 도모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다. 좌우 합작 위원회는 일종의 중도적 입장에서 좌우 양측의 협력을 통해 외세의 개입 없이 한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좌우 합작 위원회의 활동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우선,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한반도에서 우익과 좌익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강대국의 영향력을 배제한 상태에서 좌우 세력이 독자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은 좌익을, 소련은 우익을 불신하며 서로의 정치적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좌우 합작 위원회의 협력은 지속적으로 외부의 방해를 받았다.
내부적으로도 좌우 간의 이념적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좌익 세력은 소련의 지지를 받으며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기를 원했고, 우익 세력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념적 차이는 좌우 합작 위원회의 활동을 계속해서 방해했고, 양측 간의 협력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좌우 합작 위원회는 목표했던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대의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좌우 합작의 실패는 한반도의 남북 분열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 인해 남한과 북한은 각각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길로 나아갔다. 1948년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어서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공식적으로 두 개의 독립된 정부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곧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항상 결과는 과정을 종속시키듯,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대로 건국을 하였고, 지금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