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광복과 남북 분단의 시작
1. 8.15 광복과 국제정세의 변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선은 35년 간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이 날은 조선 민족에게 역사적인 이정표가 되었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이 실현된 순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광복은 단순히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지 않았다. 국제정세의 변화,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형성됨에 따라 조선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선의 독립은 이제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이로 인해 조선 민족은 남북으로 분단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광복은 조선 민족에게 역사적인 이정표였으나, 동시에 새로운 도전 과제를 안겨주었다. 국제 사회의 세력 균형 속에서 조선은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의해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1945년 전후, 전 세계적으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었고, 식민지 해방의 열망이 커지는 가운데 조선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일본의 패망 이후, 조선은 이제 새로운 패권 국가들 간의 이해관계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제한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각의 이념과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미국은 민주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체제를 조선에 뿌리내리려 했고, 반면 소련은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체제의 구축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조선 민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독립을 염원하는 조선인들은 이러한 외부 세력의 개입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2. 미군정의 도입과 남북 분단의 고착화
1945년 9월, 미국은 조선 남부에 미군정을 수립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주된 목표는 조선의 정치적 안정과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동시에 조선 민족의 자치적 요구를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군정은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며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미군정 하에서 조선의 정치적 진출은 제한되었고, 이는 결국 민족의 단합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미군정의 정책은 조선 내에서 급속히 증가하는 정치적 긴장과 갈등을 유발했다. 조선의 정치 세력들은 각기 다른 이념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다원적인 정치적 환경 속에서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한 기회를 잃고, 남북 간의 이념적 대립은 점차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 민족은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좌익 세력을 탄압하고, 우익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정치적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 내의 정치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이 자주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다.
미군정은 조선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논의에 대해 제한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이는 결국 조선이 스스로 정치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줄였다. 이로 인해 조선의 민족은 자주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발판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의 자주성과 통일에 대한 갈망을 더욱 고조시켰지만, 동시에 남북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3.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설립과 활동
광복 이후, 조선 민족은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의 설립은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945년 9월, 건준위는 다양한 정당과 단체가 참여하여 조선의 자주적 정부 수립을 위한 기구로 결성되었다. 건준위는 조선의 정치 체제와 헌법을 마련하며, 독립 정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건준위는 민주적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여,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미군정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활동은 여러 제약을 받았으며,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종종 무시되거나 억압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준위는 조선 민족이 원하는 자주 정부 수립을 위한 방향성을 지속적으로 찾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건준위의 활동은 조선의 정치적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정치적 목표를 명확히 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과 협력하려 했다. 그러나 내부의 갈등과 외부의 압박 속에서 그들의 활동은 자주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4. 내부 갈등과 그 여파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자유시 참변(1920년)은 조선 독립운동의 복잡한 내부 갈등과 정치적 혼란이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진 사건이다. 1919년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이 단순히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국가의 건설로 확장되면서, 독립운동가들 간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독립군 내부의 분열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이어져 비극적인 참변을 초래했다.
자유시 참변은 단순히 일본의 군사적 공격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조선 민족이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 겪어야 했던 복잡한 내부 투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자유시 참변은 독립운동가들 간의 이념적 대립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과 정치적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필요한 내부의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이 사건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단순한 저항의 차원을 넘어,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을 위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광복 이후 조선은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자주적 정부 수립을 위한 과제가 얽혀 있었다. 8.15 광복은 조선 민족에게 독립의 기쁨을 안겨주었으나, 동시에 남북 분단이라는 새로운 도전 과제를 안겼다. 미군정의 도입과 건준위의 활동은 조선의 정치적 방향성을 제시하였지만, 그 속에서 민족의 자주성은 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조선의 독립과 국가 건설이 단순한 정치적 목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정치 세력 간의 경쟁과 협력이 얽힌 복잡한 역사적 과정임을 알게 한다. 건국운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된다. 과거의 갈등을 넘어, 조선의 미래를 위한 자주성과 통일의 과제를 향한 노력이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점은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의 역사적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비전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반성을 통해, 우리는 보다 나은 사회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 식민지는 끝난 것이며 1883년부터 시작된 조선의 개화는 1894년 일본이 1854년부터 학습한 자본주의 열강들의 식민지의 야욕을 통해 개화가 되었고 근대화의 개념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조선 정부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는 시늉을 하며 발버둥 해보지만 사치와 부정부패에 찌들고 올바른 경제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던 대한제국은 대원군의 경복궁복원 핑계로 발행하는 화폐제도와 민 씨 척족들의 무분별한 어음 난발로 경제는 더 어려워졌고 그 무렵 한반도에 몰아닥친 가뭄은 백성들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던 시대였다. 이때 더 눈여겨봐야 할 일은 그 당시 재정이 부적했던 조선의 상황이다. 정부 관료들은 차관을 들여오는 것을 고종과 협의하였고 고종은 그렇게 얻어진 돈으로 더욱 사치를 하였다. 이후 1910년 경술년 대한제국의 모든 것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이지만 그 운동의 마음은 1910년에서 1919년 3.1 운동까지가 나라를 되찾겠다는 생각이었지 이후의 임시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정수 수립의 소식을 아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기 시작한 것이다. 무관심과 새로운 나라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 말이다. 무관심은 바로 그 이전의 조선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나은 일자리에서 차별 없는 대접을 받았고 일본인이 또 다른 상전이 되어있는 상황이었지만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적 멸시를 당하지는 않았다.(또 이 부분을 가지고 비사실적 비논리적 민족주의자들은 공격을 하려들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향한 집념의 백성들은 건국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모두 독립운동으로 불러오다가 건국의 시점을 두고 1919년과 1948년으로 나뉘어 싸우는 양상은 그야말로 어린 시절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돌팔매질하며 싸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의 수립과정으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독립영웅들, 건국의 영웅들이 어떻게 지금의 나라를 만들어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