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덕수의 사랑
덕수와 지혜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혜는 사별한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선장의 배에서 함께 일하면서 점차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덕수도 상처를 품고 바다로 내려왔고, 고단한 삶의 한가운데서 겨우 자신을 추슬러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며 서로에게 준 위안은, 작은 바람결이 두 파도 위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았다.
어느 토요일 저녁, 덕수는 작업복 차림으로 퇴근한 후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식당에서 손님을 맞이하느라 무척 바빴다. 지혜의 전화기는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서빙에 정신이 팔려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덕수는 전화를 끊고, 지혜가 있는 선장의 횟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하지만 지혜가 한창 바쁜 모습을 보고는, 괜스레 민망해져서 그녀가 눈치채기 전에 돌아서려 했다.
덕수가 뒤돌아 나가려던 순간, 지혜는 그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덕수는 얼른 나가면서도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 그는 샤워를 하고, 혼자 앉아 지혜에게 다시 연락할 타이밍을 고민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내일 뭐 하세요?" 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수는 놀라서 급히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어... 저 별거 없어요."
지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그럼 저 좀 도와주실래요?"
덕수는 속으로 '예썰!'을 외치며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네, 어디로 몇 시까지 갈까요?"
"편한 작업복 입고 아침 7시까지 저희 집으로 와요. 아침 같이 먹어요."
덕수는 크게 대답하고는 라면을 끓이려 했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치볶음, 된장찌개, 구운 김, 계란말이까지—덕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녁 식사를 즐겼다. 이후 마당에 나와 별을 올려다보며, 마치 어릴 적 그리워하던 고향의 밤하늘을 다시 보는 듯한 기분에 잠겼다.
덕수야! 노올자! 마을 형인 기수가 집 앞에 나타났다. 덕수는 별구경에 빠져 있다가 소리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에이, 좀 더 일찍 오시지... 오늘 잔치처럼 차려 먹었는데!"
기수는 웃으며 봉투에서 막걸리 두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꺼냈다.
"내가 그럴 줄 알고 일부러 늦게 왔지. 막걸리나 한잔하자고!"
덕수는 형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 두부김치를 내왔다. 기수는 막걸리를 한 모금에 들이키며 말했다.
"덕수야, 너 지혜 맘에 들지?"
덕수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형님, 제가 무슨 자격이 있겠어요."
기수는 진지하게 덕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같은 남자면 충분해. 남자들이 다 너만 같으면 여자들은 행복하지."
덕수는 민망해하면서도 속으로는 기수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 기수는 덕수를 격려하며 둘은 다시 한 잔을 기울였다. 밤은 깊어 갔고, 덕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다음 날, 덕수는 어김없이 7시까지 지혜의 집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지혜는 이미 마당에서 생선을 말리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 너무 일찍 왔잖아요?" 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도와드리려고요." 덕수는 씩 웃으며 지혜의 일손을 거들었다. 그들은 나란히 생선을 말림판에 널었다. 지혜는 덕수의 손놀림이 익숙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작업을 마치고 둘은 지혜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선장은 덕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 아들 왔네! 하하하!"
덕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선장의 아내도 덕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우리 덕수 씨는 참 든든해 보여요."
덕수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사모님, 그냥 덕수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자 선장과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럼 우리도 덕수라고 부를까? 하하하!"
그 따뜻한 분위기에 덕수는 오랜만에 누군가의 가족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덕수와 지혜는 바닷가로 나섰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두 사람은 오래도록 걸었다.
덕수는 걷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지혜 씨, 저는 많이 부족하지만... 지혜 씨를 정말 진심으로 지켜드리고 싶어요."
지혜는 그의 엉성한 고백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백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꽃도 없고, 반지도 없고... 그냥 말로만 하다니."
그러면서도 지혜는 덕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실, 덕수 씨를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어요. 아버지 배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밝아지는 덕수 씨를 보게 됐죠."
덕수는 지혜의 말에 깊은 감동을 느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저...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지혜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췄다. 멀리서 선장과 그의 아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덕수와 지혜의 첫 키스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작은 소문거리가 되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