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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기억하지 않는다

by 이문웅

우리가 살았던 흔적들은

대부분 사라진다.

누군가와 나눈 말들,
가슴을 아프게 했던 감정들,
한때는 너무도 중요했던 선택들조차
조용히 흩어지고, 조용히 잊힌다.


지구는 그 모든 걸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가 울었던 자리도,
사랑을 속삭였던 거리도,
혼자 앉아 있던 벤치도,
그저 시간의 먼지 속에 묻혀간다.

우리가 얼마나 애썼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어떤 상처를 품고 있었는지—

지구는 모른다.
그리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가 차갑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지구가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판단하지 않고,
잊으면서도 품어주며,
묻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지탱해주는 방식.
말없이 발밑을 내어주고,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서게 해주는 그 자리.

그게 어쩌면
지구의 사랑이다.

하늘은 위로를 주지만,
땅은 판단하지 않는다.
하늘은 잠시 마음을 들어 올리지만,
지구는 언제나
말없이 받쳐주는 존재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한다.
기억되기를 바라고,
기억하려 애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대부분 잊힌다.

이름도, 얼굴도,
그날의 기분도,
정확히는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이
처음엔 슬프다가,
나중엔 조금은 편안해진다.


지구는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어떤 풍경, 어떤 냄새, 어떤 웃음소리.

그 기억은 지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만 남아 있는 작고 연한 기록이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진다.

남기려 하기보다는
살아내려는 마음이 커진다.

우리는 언젠가 이곳을 떠난다.
누구나, 언제나, 반드시.

그리고 그때가 오면
이 땅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봄을 피우고, 바람을 일으키고,
새들을 불러낸다.


우리 없이도
지구는 아름답게 계속된다.

지구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은
그 자체로 충분해야 한다.


기억되지 않더라도,
그 하루를 진심으로 살아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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