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반짝임
밧소는 눈을 감고 갈대밭 건너편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어. 바람이 갈대를 가르고, 줄기와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 경관에 운치를 더해줄 곁가지에 마음을 모으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터였지. 밧소는 남들이 쉽게 지나치던 것들에 신경을 쓰는 아이였어.
아이의 세상은 어른들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선명했고, 세밀했으며, 때로는 불규칙했어. 어른들은 사람이 만드는 역사가 불규칙하고, 그러므로 불안정하다고 말했지.
그러나 밧소의 눈에 사람의 손과 무관한 세계 역시 불규칙하지만 뚜렷한 까닭이 있었고, 아득한 저편에서부터 이미 균형을 이뤄 찾아온 것들이었어.
그렇다면 세상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누군가의 손에 만들어진 것일까? 소년은 생각했어. 아마 둘 다에 해당할 것이라고.
가을이 깊어지면 이 강 위에도 새하얀 물결이 칠 거야. 바람을 따라 넘실거리는 흰 파도는 많은 생명을 감춰주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어른들은 한사코 관심을 두지 않을 테지.
그러나 아이들은 우거진 줄기를 헤치며 이곳저곳에 숨어있는 신비를 발견하겠지. 그들에게는 아직 신기한 세상이겠고, 경외를 잃지 않은 마음에서만 발견되는 작은 반짝임이라 할 수 있을 거야.
밧소가 발걸음을 돌려 돌아갈 집은 반짝이지 않았어. 어른들의 눈가는 빛을 잃었고, 그들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꿈도 담겨있지 않았지.
매일 술에 취해 돌아와 소리 지르는 아빠와 밥을 먹을 때마다 소리 지르며 저주하는 엄마를 본다면 밧소는 막연히 두려움을 느꼈어.
시간이 지나면 녹색 나무가 색을 잃듯이 어린 밧소도 갈색 빳빳한 낙엽으로 변할 것만 같았지. 언젠가 자신에게도 바람에 떨어지고 바스러지는 쓸쓸한 계절이 오고야 말거라 생각했어.
무겁게 세 걸음 정도 떼었을까. 아쉬운 입꼬리를 감추지 않고 뒤를 돌아봤어. 갈대가 들을지 풀벌레가 들을지 모르는 일이었어. 밧소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
"저물지 않는 꽃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땅바닥에서 썩고 싶지 않아..."
변함없이 변화무쌍한 소리를 대답으로 대신하고 밧소는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돌아갔어. 밤새 큰 폭풍이 밧소의 고향을 때렸어.
나무가 쓰러지고, 헛간이 망가져서 밤새 소와 말이 우는 소리로 사람들은 잠을 잘 수 없었지. 가산이 물에 떠내려가고, 목줄이 풀려 도망가게 생겼는데 잠이 오겠어?
밧소는 밤새 양동이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천장에서 줄줄 새는 땟국물을 받아야 했어. 밧소는 멀리 큰 도시에서 나온 주교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 뱉은 말이 떠올랐어. '가난은 정말이지 행복을 앗아간단다.'
뭘 아는지 모르는지, 반반하고 새하얀 어린 수도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친구들과 흙장난하던 밧소와 친구들을 쳐다봤단다. 하나도 부럽지 않았는데, 어쩐지 얼굴이 화끈하니 숨고 싶은 기분이었어.
그 사람들의 눈에 밧소와 친구들은 진즉에 가슴에 빛을 잃어버린 죽은 별이었을 테니까. 그들은 영원히 빛나는 해와 달 주변에서 함께 반짝거리는 높디높은 하늘의 천체들이었어.
금색 수놓은 옷을 입었으면서, 자기는 평생 구경도 하기 힘든 새하얗고 붉은 비단으로 옷을 입었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신은 넝마를 입고 냄새나는 양 떼와 들판에서 낮잠을 잤다고 말했지.
교회에서 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 하는 말 자체는 아름답고, 어딘가 따뜻한 구석도 있었어.
내뱉은 사람들의 입술과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가슴에 날아와 박힌 가시 같았어. 그러니까 밧소가 느낀 아름다움은 말이지 정말 오래오래전에 그곳의 모든 사람들의 조상들에게도 까마득한 오래전에 나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게 분명했어.
그때의 따스함이 여러 세대를 거쳐서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에 그 이야기 어딘가에서나 겨우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 밧소는 내심 오소소 닭살이 돋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어.
폭풍이 휩쓸고 간 마을은 어지럽고 삭막했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던 모습은 잔해를 줍고 욕을 뱉으며 거리를 치우는 사람들이 조용히 땅에 뿌리고 있는 것 같았어. 겨자씨를 파종하는 것만 같았지.
"꾸물거리지 말고, 닭장이나 보고와! 내가 가서 암탉이 사라져 있으면 오늘 흠씬 두들겨 맞을 줄 알아라."
눈을 부라리며 아빠가 소리쳤어. 닭이야 사라졌을지도 모르지.
발바닥이 부르터지게 풀숲을 뒤지다 보면 운 좋게 찾을지도 몰랐어. 어쩌면 오소리나 삵이 물어갔을지도 몰라. 이웃집 빈빈의 고양이가 밤사이 물어갔을지도 모르지.
아빠가 한 말은 그러니까 어떻게든 머릿수만 채워놓으라는 말이었어. 훔치든 뺏어오든 그가 알빠가 아니었지.
'어쩌면 반짝임이란 미안한 줄을 알고,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유지되는 것인지도 몰라.'
밧소는 아빠의 말을 곱씹으며 마음이 강퍅하다면 사람은 금세 빛깔을 읽고 낙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 생각했어.
아이들이 빛나는 이유는 가장 먼저 배운 옳고 그름이 세상에서 적어도 두 번째로는 중요했기 때문일 거야. 첫 번째는 역시 자신이겠지. 하지만 두 번째에도 자기밖에 없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거야.
묽은 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하고 발목이 빠지게 돌아다녀서 겨우 두 마리를 찾았어 한 손에 한 마리씩 목을 쥐고 헛간에 집어넣었지. 엄마도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은 눈치였어.
잘했다는 칭찬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지. 하지만 아빠 몰래 호밀빵 반쪽을 건네주셨어. 밧소는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어.
"엄마 고마워요. 사실 배가 무지무지 고팠거든요. 이거 지금 나눠 먹을까요?"
엄마는 됐으니 저기 가서 먹고 돌아오라며 집으로 들어가셨어. 어른은 할 일이 태산이거든. 엄마는 밧소가 매일 갈대밭으로 가는 것을 알았어. 아빠는 그런 곳에는 관심도 없고, 밧소는 한 번 갈대밭에 가면 돌아올 생각을 안 했거든.
그러니까 그곳에 가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오라는 말이었어. 어쩌면 엄마의 가슴 한편에는 작은 반짝임이 남아있을지도 몰랐어. 밧소가 있기 때문인지는 밧소도 모르는 일이었지. 오늘을 별을 보고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하며 밧소는 강가로 향했어.
많은 갈대가 바람에 쓰러져 드러누워있겠지만 사실 상관없었어. 오리가 보이면 빵부스러기를 나눠주자 생각하면서 밧소는 강가로 향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