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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림보 Mar 25. 2024

내가 미역국을 끓인 이유

 “다른 집 아들은 엄마 생일날 미역국도 끓여준다더라.”     


 그까짓 미역국이 뭐라고. 순간 주인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 내가 해줄게. 마침 내 생일이니까 낳아 주신다고 고생하신 우리 어머니 위해서 한 솥 끓여볼게.”     


 실은 처음이었다. 때때로 식탁 위에 올려지는 미역국은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먹어만 봤을 뿐 직접 주방에 서서 미역을 불려 본 적도 없다. 괜한 이야기를 했나 싶기도 했다. 그놈의 ‘엄마 친구 아들’이 문제지.

 근데 놈보다 나은 게 있을까.


 뱉은 말도 있고 체면도 서야 하니 무를 순 없었다. 결국 급하게 유튜브를 켜 ‘미역국 레시피’를 쳐본다. 수 백개의 영상이 떠오른다. 그중에 눈에 띄는 두 가지. 하나는 국거리 소고기와 미역만 있으면 곧장 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직접 육수까지 우려내는, 꽤나 노력이 필요한 미역국이었다.      


 ‘기왕 하는 김에 정성 들이는 걸로 해보자.’     


 겁도 없이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가장 먼저 집에 필요한 재료들이 있는지 확인부터 했다. 육수를 내기 위한 무, 대파, 사과 반쪽 그리고... 제일 중요한 고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황하진 않았다. 장 보러 갈 각오는 당연히 했으니까. 퇴근길에 동네 정육점이 하나 있다.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대로변의 건물 1층 정육점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빛 조명이 눈에 번진다. 아래로는 질서 정연하게 진열된 고기들. 하나씩 눈에 담아본다. 이건가. 두 주먹 만한 불그스름한 고깃 덩어리.      


 소고기 양지 30,000원 한우 1+      


 냄비 채로 푹 삼 겨 진한 육수 내음이 집안 전체를 가득 메울 상상을 머금은 채 계산대로 가져간다.


 아직까진 순조롭다. 집에 돌아와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유튜브에서 레시피 영상을 다. 회사 있는 동안 두어 번은 봤던 것 같지만 노파심에 한번 더. 이제 진짜 시작이다.     


 우선 양지고기의 핏물부터 빼준다. 하얀 키친타월이 붉게 물들 정도면 충분하다. 봉지라면 5개는 족히 끓일 정도의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얹힌다. 다듬은 대파 두어 개와 삼등분한 무 그리고 사과 반쪽을 고기와 함께 넣는다. 재료들이 잠겨 참방거릴 정도로 물을 채워주면 일단 육수 만들기 준비 완료. 끓이면 끓일수록 진한 맛을 내기에 몇 시간이고 불을 댕겨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한 시간만 해준다.

 중간에 물 위로 뜨는 거품도 걷어내야 잡내가 사라지기에 자리를 뜰 수 없다. 아, 그 사이에 마른미역 한 줌을 얼른 소쿠리에 담아 물에 불려 줘야 한다. 소쿠리가 가득 찰 만큼 불어나면 흐르는 물에 바닥바닥 씻겨준다. 그쯤 하다 보면 육수도 나름 제 색깔을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힘들었다. 아직 미역 가지고는 시작도 못 했는데 진이 점점 빠지는 느낌. 정성인지는 모르겠지만 긴 시간을 온전히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간 차려주는 밥상과 간편하게 시켜 먹던 배달음식에 익숙해져서일까. 육수가 마저 끓여지는 동안 잠시 앉아서 한숨 돌린다.     


 치이익-     


 앉아 있지를 못한다. 잠시였지만 육수가 끓어 넘친다. 급하게 달려와 불을 줄이고 냄비 뚜껑을 다. 희뿌연 김 사이로 뽀얗게 올라온 육수가 보인다.     

 이제 고기와 건더기를 체로 걸러낸다. 푹 익은 양지는 고명으로 썰기 위해서 잠시 나무 도마 위에서 식혀준다. 그 사이 다른 냄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참기름 다섯 숟가락과 미역을 넣고 볶는다. 고소한 향이 주방을 가득 메우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냥 맛있을 것 같다. 넋을 놓고 볶다가 문득 주변을 살펴보니 마늘 세 쪽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다진 마늘. 처음부터 넣어서 매운맛을 날리는 게 포인트라고 했는데. 늦게나마 얼른 마늘을 다져 넣어준다. 코 끝을 찌르는 매운 냄새가 달큼하게 바뀔 때쯤 준비해 둔 국간장과 액젓을 한 숟가락 씩 넣는다. 서로 다른 색의 향들이 번갈아 나기 시작하면 끓여준 육수를 붓고 한소끔 끓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한 숟갈 떠서 간을 본다.     


 “어, 뜨뜨!”     


 바보 같이 한 입에 넣으려다 입천장을 다 데어버리고 말았다. 순탄하게 가는 법이 없다. 찬물을 입에 머금고 달궈진 입을 달래 본다. 다시 조심스럽게 한입 하고서는 소금으로 마지막 간을 친다. 됐다.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잠근다.     


 장장 2시간을 서서 만든 미역국. 그만한 맛이 나왔을까. 차라리 미역국 전문집에서 외식하는 게 나았으려나. 생각을 뒤로한 채 샤워하러 가던 중 뒤에서 어머니의 한마디가 들렸다.   

   

“맛있다. 잘 끓였네, 우리 아들.”     


 괜스레 헛기침을 해대며 욕실 문을 닫고선 거울 앞에 섰다. 그 속에 비친 모습은 분명 엄마 아들이었다.

 오늘만큼은 당당히 그 얼굴을 마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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