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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May 28. 2023

가난의 낭만

 유럽에서의 나는 가난했기에 낭만적이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낭만을 잃지 않기 위해 가난 속으로 부러 걸어 들어갔다. 매일같이 거닐던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에서도, 두 한국인 동생들과 살을 부대끼며 지내던 바다 앞 작은 아파트에서도, 인터라켄과 니스, 프라하, 파리, 로마 등 여행지의 멋진 경관 앞에서도. 나는 부러 가난을 쫓았다.      


 단돈 1유로를 아끼기 위해 더 저렴한 음식점을 찾았고, 걸을 수 있는 거리부터 걷기엔 다소 애매한 거리까지도 부지런히 걸었다. 더블린에서는 우산 값 5유로가 아까워서 진종일 비를 쫄딱 맞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끼니를 대신하여 길거리 소시지와 싸구려 와인으로 배를 채웠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돈을 아낀 이유는 단순했다. 한정된 금액으로 더 많은 도시를 돌아보고 싶다는 욕심. 처음에는 단지 그 욕심이 나를 더 지독한 자린고비로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이런저런 이유로 여윳돈이 생겨난 이후에도 나는 그런 자린고비 생활을 이어갔다. 절약하는 유럽살이에 이미 익숙해진 탓도 있었겠지만, 나를 충만히 채웠던 그간의 가난을 아직은 잃기 싫다는 마음이 가장 큰 이유였다.      


 때론 수행자처럼 온갖 욕심을 절제하는 스스로가 평생토록 대견할 것 같아서, 때론 서울에서의 내겐 그 어떤 감흥도 주지 않던 작은 일들에도 아이처럼 기뻐하는 나 자신이 사무치게 그리울 것 같아서. 주머니에 얼마가 있던,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앞으로의 유럽살이도 그렇게 가난의 낭만으로 채우겠노라 나는 결심했다.     


 가난조차 낭만이 되는 유럽살이는, 돈도 직업도 명예도 명성도, 무엇이든 채울수록 행복해지는 나의 서울살이와는 사뭇 달랐다. 주어진 일과를, 통장을, 주변을, 온갖 마음속 욕망들을 가득가득 채우려 애쓰던 서울에서의 내가 지구 반대편에 오자 무엇이든 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비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내 곁을 채우는 작은 기쁨에도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린고비였을지도 모른다.

런던 히드로 공항 바닥에 모로 누워 불편하게 쪽잠을 청하면서도 몽롱한 그 여유가 사랑스러웠다. 아테네 시장에서 산 0.7유로짜리 싸구려 샴푸 탓에 뻣뻣해진 머리를 말리면서도 설렘에 반짝이는 거울 속 나의 눈이 좋았다. 길가에 걸터앉아 넘기는 싸구려 와인 한 모금에 세상을 다 가진 양 해맑게 웃어대는 나의 입이 좋았다.


 가성비 좋은 식당을 찾아내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낸 뒤 밀려오는 졸음에 해맑게 미소를 짓곤 했다. 더블린의 한 펍에 앉아 비에 젖은 몸을 말리며 빈속으로 벌컥 삼키던 기네스 맥주 한 잔에 울컥 눈물이 났고, 몬주익 언덕에 걸터앉아 와그작 씹어먹던 복숭아 한 알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꼈다. 1유로짜리 커피를 홀짝이며 뒹굴대던 학교 앞 시우타델라 공원의 잔디는 세상 그 어떤 침대보다 포근하고 따뜻했다.      


 ‘이렇게도 살아지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날, 학교 앞 공원에 우연히 들른 나는 진종일 잔디밭을 뒹굴던 내 또래 청춘들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팽팽한 고무줄처럼 늘 긴장 속에서 버티듯 살아온 스스로의 젊음과, 내 앞에서 여유롭게 맑은 햇볕을 즐기는 그들의 청춘을 함부로 비교했다. 어쩌면 그들이 누리는 사소한 기쁨의 순간을 남몰래 질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살아지더라’

반년 간의 ‘가난의 낭만’을 뒤로한 채, 온갖 애씀의 세계인 서울로 돌아와 또다시 아등바등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가끔씩 이 말로 작은 위로를 건넬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다. 이따금 맞이하는 실패 앞에서 기가 죽은 스스로에게, 모든 욕심을 충족하지 못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위로를, 그 시절에 얻은 행복의 기억들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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