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은
- 연기에 감정선을 따라 가며 보고 싶을때, 보면 좋은 영화
- 혐오와 비난의 시대
내가 사랑하는 두 배우의 열연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서사는 내 개인적인 취향을 자극한다.
천호진 님의 연기, 그리고 유해진 님의 연기로 하여금 이야기가 극에 달함에 따라 함께 그 열연의 지점이 맞닿아 미장센을 더욱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가?
그것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자를 죽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것. 그래야 내가 사는것.
쫓고 쫓기는 서로의 기억 속에서 하나씩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을 스펙터클 하게 잘 표현한 영화다.
이쯤에서 천호진 님의 수상소감이 떠오른다.
"여보, 연애할 때 한 약속을 지키는데 34년 걸렸네.
너무 늦었다.
미안해.
당신만 허락하면은 내 다음 생에 당신하고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네.
꼭 약속 지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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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현시대를 관통하는 하는 것이 빅데이터의 홍수뿐만이 아니다.
바로 비난과 혐오가 대립하며 대결하는 구도가 된다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 단어가 대립하고 있다는 것조차 아이로니컬 한 비약인데, 그만큼 그 반대되는 편에 서 있는 것이 안타깝게도 별로 없다.
"재미있는 건 비난과 혐오라는 것은 본인의 자존감을 가려주는 일로도 쓰이기도 한다."
잘못을 한 사람은 비난과 질타를 받아 마땅하며 죽어서도 그 잘못을 용서받지 못하는 이상한 시점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연예인이 자살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조롱 섞인 이야기를 하며, 악플을 다는 것에 죄책감을 묻지도 않는다. 사과를 했어도 조롱할 다음 타깃이 필요한 것 마냥 보인다.
"잘못한 건 당신이니까, 악플이 인격모독으로 발전하던가, 가족의 신상의 정보가 떠도는 것쯤은 다 감수해야 한다.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인생이 나락에 간다 하더라고 그건 당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났으니까 좀 비난을 받아도 된다. 못났으니까 혐오스럽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맥락 없이 싫다."
"한번 싫은 건 영원히 싫다."
관용은 그냥 지나치며 살면 되는 구시대적 단어가 되어버렸고, 이런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표적이 될 수 있는 분위기이다. 이해와 타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쿨하지 못한 꼰대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이런 현상은 오래전 시대를 풍미하는 단어로까지 등장하여 유행이 되곤 했었는데 그것은 "마녀사냥"이라는 단어였다. 당신이 지금 떠올리는 바로 그 이미지가 맞다. 사람을 묶어 불 태워 죽이는 행위 말이다.
이제는 많이 업그레이드되어 이유가 없는 망상과 본인이 생각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확신으로 맹비난과 혐오를 쏟아붓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돌아보라고 까지는 하지도 않는다.
그럴 시간에 그냥 인스타 릴스 하나 보는 게 더 재미있는 시간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거짓과 선동이 판이 치는 언론과 정보 속에서 그걸 판별해 내는 시간까지 감수하며 책을 읽어 공부해야 하는 게 사실이다.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원치 않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다. 세상은 이제 AI의 글이 도배를 하기 시작하므로 개성은 점차 없어질 것이며 결국에는 AI의 글을 AI가 발전시키고 우리가 계속해서 습득하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미래 세대의 숙명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서로 다름은 인정하고, 틀리다고 말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말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두에 말한 것과 같이 비난과 혐오가 누가 더 잘하나 대립하는 것이 아닌 생산적이고 건강한 이데올로기가 서로 보듬어 주며 세상을 이끄는 힘이 되길 바란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생각을 하지도 않고 우리 모두는 안락한 거짓 속에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