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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사람 Apr 23. 2023

어느 맛집에나 있는 것

조금 갑작스럽게 한 달가량의 쉼이 생겼다. 연봉협상이 결렬되어 퇴사를 했는데 감사하게도 바로 이직 자리를 구했다. 새로운 곳에 출근을 하기 전까지 잠깐 자유가 주어졌다. 인생의 몇 없는 방학이다.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다시 올는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충분히 만끽해야 한다. 바로 시간이 맞는 친구와 4박 5일 제주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거의 매년 여름휴가마다 제주를 갔었다. 제주도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꽤 많이 가봤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길게 가는 건 또 처음이다. 길어봤자 3박 4일 정도 다녀왔던 것 같다. 일정이 길다고 생각하니 욕심이 생긴다. 공항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섬 한 바퀴를 다 돌기로 작정한다.


4일 밤을 자야 하니까 숙소 네 군데를 잡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들뜬 마음에 뇌에서 마약 성분이 분비되었던 건지 연박 따위는 선택지에 두지도 않았다. 가고 싶은 명소나 맛집을 찾기도 전에 그렇게 네 개의 숙소를 급하게 예약했다. 그러고선 금방 후회를 한다. 계속 다른 숙소로 옮겨 다니면 짐 풀고 싸고의 노동이 추가되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든 것이다. 하지만 에어비앤비는 결제 후 곧바로 취소를 하려고 해도 수수료를 물어야 했다. 수수료가 꽤 많길래 그냥 처음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한다.


첫날은 공항에서부터 동쪽으로 이동해 함덕에 있는 숙소에서 묵는 일정이다. 일찍부터 서둘러 아침 여덟 시 반 비행기를 타고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요즈음 제주는 매달이 성수기라고 하던데, 거기다 각종 꽃이 만발하는 4월에는 인기가 더 뜨거울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지금껏 봤던 공항의 모습 중 가장 한산하다. 날씨가 흐려서 여행객이 많이 없는 걸까. 의외의 모습에 잠시동안 한적한 제주 공항을 말끄러미 바라봤다. 이것은 붐비지 않는 여행을 할 수 있겠다는 좋은 징조이다. 갑자기 더 신이 나기 시작한다.


부푼 설렘을 안고 밥부터 먹으러 갔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보는 것도 좋지만 여행지의 맛집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여행의 최고 묘미이다. 이번 여행도 맛있는 식사로 첫머리를 연다. 제주의 필수 코스인 고기국수 영접을 위해 공항과 가까운 고기국수 맛집을 찾아갔다. 유명한 집이라 손님이 많았지만 남은 자리들이 있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기국수는 제주에 와서 먹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음식점마다 조리 방법이 가지각색이라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별로일까 걱정이 좀 되었던 메뉴이다. 여행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고 싶기도 했다. 결과는 다행히 대성공이다. 뽀얀 국물에 옥수수면이었다. 국물 킬러는 또 연거푸 국물부터 떠먹어본다. 으어 하고 안에서부터 걸걸한 소리가 자동으로 나오는 걸 보니 합격이다. 국수랑 고기랑 먹다 보면 항상 고기가 부족했는데 여기는 고기를 많이 줘서 부족하지 않았다.


최근 갔던 음식점들이 다 그냥 평범하지가 않다. 전부 대박 맛집이다. 이러다 입맛만 계속 높아질 것 같다. 내가 맛집을 고르는 기준 중 하나는 후기의 개수이다. 항시 맞는 법칙은 아니지만 후기가 많은 곳을 찾아가면 늘 중간 이상은 갔다. 사람이 계속 찾고 발길이 끊이지 않는 데는 이유가 다 있다. 가짜와 속임수가 판치는 세상에서도 많은 수의 후기는 믿음직스럽다. 후기의 개수가 올라갈수록 신용등급도 올라간다.

하지만 전부 만족스러운 후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입맛과 취향이 다 다르다. 거의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맛집이라고 해도 그중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을 꼭 한두 명씩은 찾아볼 수 있다. 여기도 그랬다. 3천여 개의 수많은 리뷰가 있지만 다 만족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세계의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모든 이가 다 반대의 세력이 있었다. 예수님도 안티가 있었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생긴 것처럼.


나를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찾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좋은 평가들을 받고 싶다. 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만날 것이다. 단점만 콕콕 잘도 찾아내 온종일 늘어놓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고 매사가 불평인 프로불편러를 맞닥뜨릴 수도 있다.


바로 새 직장을 구한 것은 잘된 일이지만 한 곳에서 오래 일하지 못하고 나온다는 사실이 은근히 괴로웠다. 좋지 않은 평가도 감사히 여기고 고쳐야 더 발전하겠지만 너무 신랄한 비판을 당해 그만 맥을 못 추기도 했다. 내가 잘못 됐구나, 나는 별로구나 하는 의심의 구렁텅이에 깊이 빠졌었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 참 창의적이고 정성스럽게, 그리고 진심이 느껴지게 예쁜 말들을 해줬던 상사가 있었다. 퇴사를 앞둔 내게 인재를 놓쳤다, 이제 천사를 볼 수 없다 등의 이야기를 매일 해주고 눈물까지 흘렸다. 이 사람이 나를 정말 아끼고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 말들이 마음을 아물게 했다.


수많은 후기가 쌓인 맛집의 단 한 가지 공통점은 불편한 후기가 꼭 있다는 것이다. 안 좋은 말은 적당히 받아들이고 적당히 한 귀로 흘리기도 하면서 그저 지금 찾아와 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새 사랑스러운 말들이 최신 글들을 장식하고 있지 않을까. 좋은 후기들을 차곡차곡 쌓되 불편 후기에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는 맛집 인간이 되고 싶다.


배불리 먹고 나오니 건물 한쪽 화단에 피어 있는 노란색 꽃이 보인다. 제주도는 유채의 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식당 앞에서조차 유채꽃 축제 분위기가 나다니. 4월의 제주, 시작부터 느낌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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