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밍키 Mar 09. 2024

친절한 은행원

오래간만에 눈이 일찍 떠진 휴무 아침이었다. 그대로 다시 눈을 감으면 몇 초 안에 잠들어버릴 자신이 있지만 몸을 일으킨다. 정신은 내 맘대로 통제하기 힘드니 몸이라도 못 눕게 막아본다. 완벽한 휴일을 보내리라는 굳은 결의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잘 쉬었다고 소문이 날까. 어젯밤부터 고민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째깍째깍 시간은 또 간다. 빨리 대략적으로라도 계획을 짜야한다. 잘 쉬어야지 생각하면서 밀어뒀던 일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그냥 가만히 맘 편히 쉬지는 못하겠다. 어느덧 30년을 내 몸으로 살았더니 최대한 빨리빨리 해야 남들 그나마 따라가는 정도라는 걸 알아서일까. 창문으로 날씨부터 확인한다. 햇살이 맑게 들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은행에 가기로 한다. 기존의 청약 계좌를 ‘청년 주택드림 청약’으로 전환하기 위함이었다. 신호등 하나 건너면 은행에 도착한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딱히 복잡한 준비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필요한 서류가 어떤 게 있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 집에서 나왔다. 가방이나 주머니에서 허겁지겁 뒤지는 일 없이 은행원에게 바로 보여주기 위해 신분증도 꺼내서 손에 쥐고 있는다. 마치 큰 일을 치르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이 되었다. 친구에게 떨린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게 왜 떨리냐는 답장이 왔다. 나도 그게 의문이다. 갑자기 비까지 몇 방울 떨어진다.


차가운 공기의 계단을 올라가서 은행 문을 연다. 의식적으로 번호표 뽑는 기계부터 먼저 찾았다.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바로 보이는데 말이다. 옆에서 직원이 어떤 업무를 볼 건지 묻는다. 청약 계좌를 개설하러 왔다고 답했고 제일 위에 있는 항목을 누르니 번호표가 인쇄된다. 대기자가 5명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며 은행 안의 낯선 풍경을 둘러봤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대기 의자와 창구의 거리가 가까워서 상담 말소리가 들린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잘 모르겠는데.... 이 전화 한번 받아줘요.”

할아버지가 휴대폰을 건네며 말한다. 은행원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과 몇 가지 대화를 주고받는다. 은행에서는 보호자랑 통화할 일이 많겠구나 생각한다. 그 은행원은 한결같이 온화한 미소로 노인이 원하는 업무를 처리했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이 제일 중요한 시대다. 혹시라도 어르신의 부탁을 귀찮아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을 하며 나도 모르게 엿듣고 있었다. 직원의 상냥한 태도를 보며 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쉬는데 벌써 내 차례가 되었다.


걸어가면서 나를 맡아 줄 은행원의 인상을 빠르게 읽어낸다. 30대 중반의 여자였고 조금 피곤해 보였다. 입꼬리를 올리고 있지만 사무적인 표정이다. 소개팅이라도 하러 온 것처럼 수줍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고 연습했던 대사를 읊었다.

“주택드림 청약으로 전환하려고요 “.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분은 내가 원하는 업무를 척척 진행한다. 전문가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이 나이 먹고 이런 금융 지식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쉬운 내용도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너무 싹싹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셔서 뭉쳤던 근육들이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틈틈이 스몰토크까지 하는 여유도 생겼다. 서로 형식적이던 첫인상과 다르게 환하게 웃으며 계좌 전환이 끝났다. 모래주머니를 떼고 온 것처럼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밖으로 나오니 조금씩 내리던 비는 아예 그쳐 맑은 날씨가 되어 있었다.


요즘은 웬만한 은행 업무는 다 휴대폰으로 할 수 있어서 은행을 직접 갈 일이 많지 않다. 몇 년 만에 가는 곳이라 순간적으로 괜한 겁이 생겼던 것 같다. 은행 가는 것도 이렇게 떨리는데 하물며 무서운 소리가 계속 들리고 얼굴을 가리고 입을 벌려야 하는 치과는 얼마나 더 그럴까. 갑자기 큰돈이 나갈 일이 생긴다는 점도 공포로 작용할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치과 공포증이 심한 환자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무서운 공간 중 하나다. 치과에 오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했을까. 얼마나 오기 싫었을까. 갑자기 그들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누군가에게 치과는 나에게 은행 같은 존재일 것이다. 나의 공포를 잠재운 건 다름 아닌 은행원의 친절이었다. 많은 이들이 무서워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장을 관용구처럼 새기고 환자를 대해야겠다.

은행 업무 하나 끝내고 나니 잘 쉬었다고 소문이 날 것 같아 날씨처럼 기분도 덩달아 화창해진다. 며칠 새 따뜻해진 기온을 느끼며 휴일을 마저 즐기기 위해 카페로 향한다.

작가의 이전글 늦은 다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