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우리에게 영감을 줄까요
여행을 많이 가는 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문화와 예술의 메카 유럽 여행만 세 번을 했고, 일본은 몇 번을 갔는지 셀 수도 없다. 아마 대학교 1학년의 1년 중 한 달 이상은 일본의 료칸에서 온천을 하거나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버터 맥주를 사먹으며 보냈을거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뉴욕에서는 꼬박 일 년을 살았고, 온전히 즐기려는 목적으로 홍콩과 방콕, 푸켓도 여러 번 가보았다. 대부분의 내 또래보다는 여행을 많이 다니며 또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할 때마다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은 초등학교 2학년 첫 유럽 여행을 하기 전 엄마가 예쁜 노트와 스테들러 펜 세트를 사주시며 시작되었다. 엄마는 여행을 다니는 한 달 동안, 하루가 끝나고 호텔에 들어가면 자기 전 그날 느낀 것을 기록하라고 하셨다. 당시에도 나는 그 노트가 추후 내 보물이 될 것을 알았는지, 그 노트는 여행 첫날 홈메이드 버터와 잼이 맛있었던 영국의 호텔 책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여행의 마지막 날 따뜻한 물로 반신욕을 하고 조각조각 초콜릿을 잘라먹던 홍콩의 야경 앞 침대에서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되어 친구와 함께 간 여행에서도, 여행 첫날 파리에서 한 것은 피카소 뮤지엄에 가 인상 깊게 보았던 알렉산더 칼더 작품을 표지로 한 노트를 사는 것이었다. 스위스 기차표부터 온갖 뮤지엄 입장권, 오페라 티켓, 모네의 엽서 등을 붙이며 스크랩북과 일기 그 중간의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고수했던 파리가 아닌 친구가 가고 싶어 해 여행 도시로 넣었던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들이었다. 당시 나는 가우디의 자연과 음식에서 영감을 얻은 트렌카디스 기법에 흠뻑 빠진 나머지 머지않은 언젠가 내가 여기서 얻은 영감을 사용할 곳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우디 콘셉트의 유럽 여행 잡지라든가.
생각보다 '여행에서 경험한 것 활용하기'는 쉽지만은 않았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어도, 저 먼 나라에서 찾은 어떤 영감보다는 리서치에서 찾은 레퍼런스를 많이 활용하게 되었다. 어쩌면 여행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하고, 시야가 더 넓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여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어떤 성과를 얻고자 하는 나의 정당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Eat Pray Love>를 읽은 불과 3일 전에 1일 3 젤라또를 하기 위해 로마에 날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비록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 값으로 한국에서 218개의 젤라또를 먹을 수 있더라도.
내가 궁금한 것은 '여행의 성과'이지만 이는 '여행의 이유'와도 연관이 있기에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그 또한 여행을 좋아하고 많이 가는 사람이며 만약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그는 여행을 갈 것이다. 다만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우리는 왜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가?
공감이 갔던 부분. 영감을 얻거나, 찬찬히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떠난 여행에서는 언제나 화려한 구경거리들과 풍부한 먹거리에 흠뻑 빠져 목적을 잊고 말았다. 실제로 영감은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할 때라든가 꿈에서 깨어난 직후,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 같은 소소한 때에 생기곤 한다.
저자는 그 이유를 여러 방면에서 탐구한다. 가장 고개가 끄덕여진 부분은 인간의 DNA에 여행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은 우리의 본능이다. 그렇지만 설득력이 조금 덜하더라도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드톤의 깔끔한 호텔 침대에 두 팔을 양쪽으로 뻗은 채 누워있다고 생각해보자. 주위 물건들은 다 새것처럼 보인다. 마치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것인듯 각이 잡혀있는 침구, 물을 틀기 아까울 만큼 보송한 화장실.
호텔 청소의 원칙은 전에 머물던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분명 이 방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왔다 갔을테지만, 우리는 모든 시각, 후각, 그리고 촉각으로 마치 우리가 첫 손님인 양 느낀다. 모든 게 백지이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호텔방을 선사한다. 모두가 공감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행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호텔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유를 즐기다보면 어느새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과거에 가지고 있던 고민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이나 다짐 같은 것들. 게다가 여기는 내 일상의 배경이 아닌 낯선 도시다. 저자는 이걸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라고 명명한다. 기존 우리의 고민, 상처, 심지어 추억까지가 있는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하는 느낌을 선물하는 호텔방은 우리가 여행을 갈망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여행은 여행에서 느끼는 행복과 그 행복이 과거가 되었을 때의 추억만으로도 충분하다. 파리를 떠나기 전날 센느 강 앞에 앉아 오후부터 해질녘, 밤까지 같이 떠난 친구와 나눈 대화와 매 식사에 함께한 바르셀로나의 띤또 데 베라노, 스위스 가장 낯선 곳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과 천사 같은 아이. 이런 추억들을 생각하면 인생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여행에서 받은 영감으로 직접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성과를 내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분명 여행의 경험은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싸여 '나'를 형성하는 나이테가 되어주었다.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의 무대가 반만 보이던 좌석에 앉아 처음 본 오페라의 경험은 추후 뉴욕에 갔을 때 일주일에도 여러 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방문하게 해주었다. 사파이어 색의 물이 흐르던 인터라켄에서의 며칠은 지구 서쪽에 위치한 내 마음속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여행이 과연 나를 성장시키는걸까, 하는 의문을 품던 나에게 안도가 되어준 문단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