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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쥴줜맘 Mar 24. 2022

다섯 살 아이 말에도 힘이 있다.

아! 나는 혼자가 아니지.



하루는 손끝 발끝으로 있는 기력 없는 기력 모두 흘러나가 버려 종이인형이 된 것 같은 날이었다. 퇴근 후 집으로 터벅터벅 들어왔는데 집안은 아이들이 보던 책과 먹던 과자 부스러기들로 뒤섞여 여기가 사람 사는 집인지 배고픈 열다섯 살짜리 장바구니인지 그대로 정신이 혼미했다. 워낙 의욕이 없는 상태이기에 잔소리도 사치였고 오로지 이 세상에 무거운 육신과 잘 수 있는 시간은 부지런을 떨어야 고작 다섯 시간 정도일 거라는 계산식만 존재했다.


그 순간 우선 요 몇 달 살이 바짝 오른 열 살짜리 큰애가 달려 나와 나를 맞으려는 중이다. 아이의 무게만큼 육중해진 관성으로 나를 밀치며 안기려는데 다행히 남편이 큰아들 어깨를 잡으면서 ‘어디가 어디가. 지금 받아쓰기 중인데’라고 만류해주어 내 뼈들과 부딪히려는 아이의 팔다리를 가로 세웠다. 그런데 두 번째 관문인 우리 둘째가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그 작은놈은 아빠 다리 사이로 기어 나와 바리바리 짊어진 내 손에 짐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부러질 것만 같은 팔목에 인대들이 나 대신 두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뿔싸! 결국 성질이 나버렸다. 아니 성질은 나있었고 준비된 양 기를 모아 장풍을 쏘듯 모진 말들을 쏘아붙였다. “아악!!! 아프잖아!!! 아니 엄마 무거운 거 들고 들어오는데 매달리면 어쩌라는 거야! 왜들 안 자고 나와서 이래!” 가족들은 모두 당황했다. 바른말을 하기 좋아하는 남편은 한마디 하고 싶어서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대고 있었고 큰아들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는 뺀질이 눈빛으로 동생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사건의 중심에 있던 작은놈은 삼초 뒤 울음을 터트렸다.


모른 척 짐들을 내려놓고 손을 씻고 나와보니 우는 아이를 토닥토닥 달래주던 남편이 말했다. “손 아파? 병원 갈 정도 아니고? 그런 거 아니면 반가워서 달려간 아들 마음 좀 이제 만져줘. 며칠 만에 보는데 소리부터 질르는 거야?” 물론 미안함이 몰려왔다. 진작에 그랬다. 그랬기에 남편의 바른말은 수치심을 들게 했고 그런 순간은 누구나 피하고 싶다. 이럴 때 보통사람인 나에게 방어기제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니 내가 애들이 안 반가워서 그런 거냐고, 내 맘은 누가 만져주는 거냐고, 자기가 하는 회사 일은 가족을 위한 일이라 성스럽고 내가 하는 일은 나만을 위한 일이라서 욕심인 거냐고.’


물론 그런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이런 순간 ‘옳소이다. 당신이 옳아요.’ 하며 부족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인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점점 더 내 시야와 마음은 무한 등비수열이 0에 수렴하듯 바늘구멍보다 더 작아져 소멸할 지경이었다. 작은 아이를 안고 있는 내 두 손은 기계적으로 토닥거리며 지루한 책을 읽는 듯 딴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기계손에서 진정한 작은놈이  품에서 중얼거린다.


엄마. 보고 싶었어.” 

?”


엄마. 내가 엄마가 와서 빨리 가까이 가고 싶었어.” 

. 아기가 그랬구나.”


엄마. 이제 소리 지르지 마. 미안해.”

아니.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엄마. 우리 이제 사이좋게 지내자.”

 엄마가  노력할게.”


방금 전까지 나는 세상에 나 혼자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 한마디에 나한테 아이도 생기고 남편도 생기고 집도 생겼다. 아이가 이렇게 힘이 있었다. 남편의 한마디도 세상에 나를 혼자 있게 했었는데 직장의 의무도 나를 더 외롭게 했었는데 아이가 입을 열고 내가 세상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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