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
이 글을 쓰기 매우 조심스럽고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그리고 많은 일들이 일어난 이후에 적는 글이다. 굳이 왜 쓰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가진 상처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다. 왜냐면 세상은 상처받은 사람들 투성이니까.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 때마침 아버지를 고소할 수밖에 없었던 박세리 님의 기자회견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https://youtu.be/JUgH22oCYkc?si=zEx0lZtiFkYQAQNW&t=132
사람들이 그렇게 자식을 낳고 싶어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나 자신을 생각해 봤을 때, 한 인간으로서 알고 보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우주로 알고, 사랑해 주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때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가 있을까. 나는 그게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은 부모를 태어나는 순간 우주로 알고, 정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부모가 얼마나 못난 사람이든 간에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도록 셋팅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서 부모 중 부와 연락을 아예 끊어버린 난, 근본적으로 그 결정을 하기까지, 내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사회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낳아서 길러준 사람과 연을 끊는다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생각되며 다른 걸 다 떠나서 나 스스로 그런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아빠를 카톡에서 완전히 차단했을 때 나는 그런 마음이었다. 굉장히 많이 울었고, 사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를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속상했으나, 만약 내가 죽어서 신 앞에서 내 죄를 고백해야 할 때 아빠와 연을 끊어서 지옥을 가야 한다고 하면, 지옥을 가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나는 그런 마음까지 들고 나서 차단을 했다.
내가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당신 나이 9살 때 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집에 돈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때부터 농사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6식구의 가장 역할을 했다. 그만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정말 투철하신 분이이며 집안을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의무감이 있으셨고, 벗어났으며, 우리 삼남매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시면서 본인의 노후 준비를 어느 정도 해두셨다.
가난하고 형편이 되질 않아 학업에 대한 꿈을 접으셔야 했지만, 결국에는 일을 하시면서 대학원까지 졸업하신 집념이 있으신 분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기본 마음가짐 (특히 노후준비, 돈을 모으고 불릴 수 있는 경제관념, 돈을 쓸 때 가치에 대한 개념, 시간 약속, 주변 정리, 항상 기본이 무엇인지 등) 검소한 삶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으며 세상 어떤 일이나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주체적인 나로 살 수 있는 독기 비슷한 걸 물려주셨다 (유전적인 성격이나 후천적인 것들 포함)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해 주셨으며 그러기 위해 평생을 검소하게 사셨다. (내가 빚지지 않고 재수, 대학교, 교환학생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짐승보다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을 제외하고) 부모란 어찌 되었든 선택의 순간에서 자식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도 있는 존재이다.
나는 그래서, 정말이지 나름대로 할 수 있을 만큼 피똥 싸게 열심히 살았다. 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배은망덕한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재수할 때까지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너무 불쌍하고 처절할 정도로 공부했다 (머리가 그다지 좋지는 않아서, 원하는 대학을 못 가긴 했지만). 교환학생 가서도 한국 사람들한테조차 영어로 말한다고, 재수 없다고 엄청 욕을 먹어 가면서 정말 최선을 다해 영어 말하기를 익혔으며 무급으로 인턴을 하면서 처음으로 해외 취업을 경험해 보기도 했다. 그 뒤로 대학을 다니면서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내 용돈을 벌었으며, 그 와중에 성적 장학금도 자주 받았다. (졸업할 때 받은 내 학점은 4.5 점 만점에 4.1점이다). 재수할 때 너무 힘들게 공부해서, 상대적으로 대학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명품을 내 돈 내고 단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으며 (현재 가지고 있는 거라면, 내 인생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내가 내 돈 내고는 절대로 사지 않을 여자라는 걸 아니까 선물로 사준 것들뿐) 박봉을 받으며 일할 때 엄마한테 8백만 원 상당의 명품 백을 정말로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 없이 사드린 것이 다이다. 엄마는 은퇴하시기 전까지 워킹맘으로 계속 일하시면서 명품 가방 하나 없으셨는데,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명품 백을 들고 다니는지 보고 나서, 엄마를 꼭 사드리고 싶었다. 나는 그러니까 정말 지극히 전형적인 K 장녀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이미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분인데, 내가 차단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궁금할 것이다. 왜냐면 심지어 당사자인 아빠 본인도 내가 왜 이러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엄마도 이 상황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은연중에 화해를 부추기는 식으로 몰고 갈 때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올라온다.
내가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먼저 쓴 이유는 그것이다. 내가 한 결정은 감정적으로 한 결정이 아니며, 그분의 모든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어서이다. 또한 나는 내 노후 준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다고 생각이 되는 2년 전부터는, 매달 내 월급의 15%를 자동이체해서 부모님께 생활비로 드리고 있다. 저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으며, 짐승도 자식이 자립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 할지라도 나는, 내가 받은 것에 대해서 다 알고 있으며 자식으로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죽기보다 싫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런 것을 다 감안하고도, 내가 아빠를 차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숨 막히게 했으며, 지금까지 본인 식대로 자식이 따라오지 않으면 분노 조절이 안되는 행동들로 가정 분위기를 개박살 낸 것.
예전에 블로그에 그게 사랑이라면, 사랑하지 마.라는 제목의 글을 썼었다. 사실 이건 비단 이성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고 가족도 포함된 것이었으며, 나에게는 사실 이 대상은 아빠였다. 자식들은 정말로 귀신같이 안다. 부모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사회적 체면과 본능적인 집착과 욕심으로 대하는지 말이다. 아빠도 조선시대 사대부부터 내려오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 남동생에게 너무나 오랫동안 집요하게 대학 졸업장을 강요했으며, 그로 인해 가족 분위기를 늘 숨 막히게 했다. 항상. 난 아빠가 마루에 앉아있으면 늘 마음이 답답하고 집이 집 같지 않았다. 나는 그 숨 막히는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서 일찍이 해외로 나와서 정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내 길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싱가폴 창이 공항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2012년 1월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국에 대한 향수병을 가진 적이 없었고, 외로움이라는 감정도 느낀 적이 없다. 미친 듯이 물가 높은 여기서 생존해 보겠다고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서 미친년 칼춤 추듯이 살아왔던 나에게 남은 것은, 한이었다. 나는 내가 성공하면, 그리고 내 남동생이 성공하면 화목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희망했다. 하지만 분노 조절 문제는 내가 믿고 희망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그분의 분노는 정치로 향했고,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로 향했다. 매번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그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옆에서 그걸 보던 남편은 충격을 받고 내가 아빠를 차단하는 이유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불가능한 희망을 붙들고 살았구나..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순간. 그때였다. 지옥을 가라면 가는 게 맞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게.
그리고 아래 나오는 영상 정말 구구절절 다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들이었고, 거기있는 댓글들도 너무 공감된다.
https://youtu.be/Y3B2zKyiI5A?si=rK4xD7s8YolXgWKj&t=56
2. 자식을 믿고 기다려 주지 않았으며, 자식의 결정을 앞장서 비난했으며 수치를 주고, 결과를 보여줘도 그다음으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는 것. 본인의 한정된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자식을 곤란한 상황에 여러 번 처하게 한 것(자세한 내용은 적지 않겠지만, 내가 대성통곡을 하고 이거 미친년 아니야라는 소리까지 들었었다.).
나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고 내가 찾은 답은 이것이었다. 나의 부족한 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공동체, 내가 사회에서 돈을 못 버는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쓸모가 없는 존재 일지라도,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 있다고 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는 그게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못났다고 비난하고 욕해도, 괜찮다. 그렇게 나를 여겨주는 가족이 있다면, 그래도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나는 거니까. 최근에 본 김미경 님 쇼츠 (남보다 못한 사이, 자녀와 멀어지는 부모들의 치명적 실수)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늘 말하거든요. (가족도) 그 기질이 다 다르다니까요? 자녀를 키우는 게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알아주고 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이 때 그걸 할 수 있게 '응원단장' 해주는 게 부모죠. 계속 박수 쳐야 돼. 계속. 예를 들어 우리 큰애가 레스토랑 해서 음식을 팔면, 어머 잘했다. 그래그래그래 레스토랑에서 잘 팔았구나. 너무 잘했다. 다른 애가 만약에 "엄마 이거 좀 요새 경제 상황 한국 너무 안 좋거든, 요새는 뭐 차리면 무조건 바보야, 2년간 차리라 공부하는 게 나아" 그러면 그러세요~~ 또 박수 쳐주고, 그럼 막내아들은 또 "엄마, 전시회 할거예야. 나 근데 1년간 돈 한 푼도 못 벌 거야" 그러면 또 그러세요~ 돈 못 벌어도 괜찮아요~ 그냥 계속 박수 치고, 그러니까 애들이 내 인생에 박수 치잖아요. 그게 되게 중요한 거예요. 아빠 인생에 박수 치고, 가족이 4명이면 4명, 5명이면 5명이 다 같이 커야 되는 구조죠." 예전에 밀라논나님의 영상에서도 어릴 때 성폭행을 당한 여자아이들이 치유가 일어나는 순간은 아빠가 그 아이에게 그건 그냥 지나가던 개에 물린 거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줄 때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왜 그분이 그렇게 앞장서서 자식을 수치 주고(차마 예시를 적을 수 없을 정도로 수치심이 들게 하는 말들), 자식에게 끝이 없는 요구를 할까에 대해서 정말 깊이 있게 생각해 봤다. 그분은 두려운 것이었다. 자식이 잘 못될까 봐 염려하는 그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 또한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받아들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디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어른이 연약한 나를 때리고 상처 주고 모욕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합리화할 수 있을까. 그러고 나서 읽게 된 공지영 작가의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라는 책을 보고 나는 각성하게 되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적어도 지나온 내 삶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예언이 있다 한들 듣고 난 뒤 우리가 온전할 수 있는 것도 그 불확실의 힘이다. 그것이 나쁜 것이든 설사 좋은 것이라 해도. 그러니 불확실성에도 이점은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이웃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사랑이 희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만 사랑의 한 부분이 희생이고 희생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하는 것. 엄마가 아기에게, 어깨가 넓은 천년이 철로 위에 쓰러진 노파에게, 용광로 같은 심장을 지닌 자가 식민지가 된 가여운 조국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가장 어린 누이에게 오빠의 밥을 해주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버지 성절이 저러니 네가 참아라"도 사랑이 아닌 것을 알며, "너만 입 다물면 우리 가족이 평화롭다"라는 학대이며, 남편이 할 일, 자녀가 할 일을 대신해 주고 진다는 십자가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안다. 이웃을 위해, 남을 위해 나를 나누고 도와주는 삶을 산다는 것과 희생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인 것이다."
공지영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p269
나의 주 양육자였고, 지금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친할머니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아빠 성질은 바꿀 수 없으니 너가 참아라.였다. 나는 그동안 독기를 가지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내 남편이 될 사람 혹은 그 누구에게도 저런 두려움, 가족에 대한 지나친 책임감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이 망가지는 일, 내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돈을 버니까 찍소리 하지 말고 따라와 같은 강압적인 말을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아빠의 자상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연약한 딸이었다.
내가 싱가폴이라는 낯선 곳에 도착해서 컨테이너 기숙사에서 와서 잘 때, 내가 지내는 곳이 불편하지 않은지 물어봐 줄 수 있는,
내가 회사에서 얼마나 어렵고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하소연할 수 있는,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
생일 선물로 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는 않은지 물어봐 줄 수 있는,
나는 그냥 그런 아빠의 관심과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딸이었다. 난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무치게 서럽다. 그냥 그걸 얼마나 미친 듯이 내가 바래왔는지를 내가 제일 아니까.
나도 안다. 우리 아버지 세대 중에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버지들도 그저 그 시대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백이면 백 다른 꼰대 사람들은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더라도, 난 나의 아빠만큼은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나는 나보다 30을 더 산 노인의 사고 체계를 바꿔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요구일지라도,
나는 그저 작고 연약한 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빠를 가슴 깊이 사랑하는 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차단할 수밖에 없는 이 마음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올해 나는 예순. 떠나오기 전 후배들이 깜짝 환갑 파티를 해주었다. 한 말씀 하라기에 내가 말했다.
젊은 시절에 비하면 너무나 현명해지고 너무나 너그러워지고 너무나 침착해졌다고 너희가 칭찬해 주니 그게 참 기뻐. 그런데 이렇게 된 건 나이가 내게 준 것이 결코 아니야.나이를 먹고 가만히 있으면 그저 퇴보할 뿐이야. 더 딱딱해지고 더 완고해지고 더 편협해 지지. 자기가 바보가 된 줄도 모르는 바보가 되지. 만일 내게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면이 있다면 그건 성숙해지고자, 더 나아지고자 흘린 피눈물이 내게 준거야. 쪽팔리고 속상했지만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때 피눈물이 흐르는 거 같았거든. 그런데 육십이 된 오늘 내 인생을 돌아봤을 때 제일 잘한 게 그거 같아. 칭찬해, 내 피눈물!"
공지영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p78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순간부터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일을 했고, 지금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연약하고 작은 나도 이렇게 피눈물을 흘리는데, 나보다 더 강하고 권위 있는 아빠는 왜 피눈물을 흘리려 하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