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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Feb 08. 2024

61. 시어머니, 설날에 저희 집에 오지 마세요.

치매환자를 위험한 사람으로 취급한 며느리

설날 한 주 전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명절에 내려가면 차가 많이 막힌 한 주 전에 엄마 모시고 우리 집으로 내려와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동생은 침묵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멈췄다. 조금 시간이 흘러 사실 그대로 말했다.


"니 형수가 엄마 치매라서 위험하다고 오지 말래."


동생은 그냥 알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비참했다. 엄마를 요양원에서 동생집으로 모시고 올 때 앞으로 엄마를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행복한 기대감과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으니 좋은 추억을 만들자는 부품 희망이 있었다. 동생과 나는 이런 행복한 상상을 했다. 요양원에 엄마가 있는 동안 만나고 싶어도 잘 볼 수 없었던 현실이 싫었다. 그래서 금전적으로 무리해서 동생집을 구하고 엄마를 요양원에서 모시고 왔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물론 엄마가 주간보호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예전보다 편하게 저녁 시간을 보내신다. 이쁜 잠옷을 입고 정말 편하게 이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동생에게 사탕을 요구하고, 사탕을 찾다가 짧은 저녁시간을 마감하고 엄마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잠이 든다. 물론 대소변 실수가 많아서 그 평온한 침대 자리는 아침마다 전쟁터로 변하지만 그래도 동생은 엄마가 편하게 지내는 것 하나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족하며 살아간다.


나는 여전히 지방에 살아서, 거리가 멀어서 자주 가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엄마 방에 설치한 홈카메라를 매일 보며 평온히 잠든 엄마 얼굴을 카메라로 지켜보며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수월해지거나 생각처럼 되는 건 해결된 아니었다. 특히 요양원 눈치 안 보고 어디든 모시고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집에 엄마가 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나는 가족에게 엄마가 우리 집에 올 거라고 했다. 하지만 대답은 강철보다도 단호했다.


"너무 아파서 집에 오면 위험하니까. 안돼. 난 허락할 수 없어."


어이없는 답변에 뭐가 위험하냐고 따졌다. 하지만 자기 생각이 맞다고 주장하는 그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이건 외국인이라서 한국정서를 모르기 때문에 이해해 줘야 한다는 정도를 지나친 것이었다.


결혼하고 엄마가 건강할 때 가끔 동생이 엄마를 모시고 내려오면 그때마다 항상 불편하게 만들었던 만들었다. 엄마가 오랜만에 집에 찾아왔어도 저녁 9시가 되기 전에 아이는 무조건 잠을 자야 한다고 딸아이를 보채고 온 집에 불을 껐다. 할머니와 삼촌이 찾아와서 기뻐서 흥분했던 딸이 말을 안 들으면 언성은 높아졌다. 나는 이렇게 사는 꼴을 엄마한테 보이기 싫어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러면 부부싸움으로 금방 이어지곤 했다. 결국 몇 번 이런 일이 생기고 딸은 자연스럽게 엄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피난을 가듯이 엄마와 동생을 데리고 집 밖을 나와 배회해야만 했다.


저녁 10시가 넘어 딸과 가족이 잠든 것이 확인되면 내가 사는 집인데 마치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 마냥 조용히 숨죽여 우리 셋은 집으로 돌아왔다. 내 집에서 내가 눈치 보며 그 흔한 치킨 한 마리를 시켜야만 했고,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거실에서 영화를 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가족이 불쑥 나와서 엄마 앞에서 시끄럽다고 말을 한 적도 있다. 누가 보면 내가 이 꼴로 사는 게 바보 같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 하소연도 못한다.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내게 이렇게 말한다.


외국인이 너 하나 믿고 한국에 와서 사는 거니까 네가 무조건 양보하고 고마워하고 무한희생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평등을 강조하지만 사실 실상은 평등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다. 약자라는 프레임을 내세운 훈수를 내게 듣기 싫은 잔소리와 같았다.


결국 엄마는 이번 명절에도 내려올 수 없다. 아니 올 수 있지만 내려오지 못한다. 오직 원하는 거라고는 사탕이 전부인 나약하고 아픈 엄마를 위험한 사람으로 몰고 아무렇지 않게 당당한 가족 때문에. 끔찍하기도 하다. 뻔뻔함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행되는 이 뻔뻔함을 당해야만 하는 게 속상하다. 말로 싸우는 것도 언어의 한계에 부딪치고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표출되는 것이 두려워 자리를 피한다. 당연히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는다. 남자가 힘이 세서 위협이 된다는 말 따위는 당연히 듣기 싫다. 하지만 내뱉는 말과 행동은 가끔 폭력보다 더 폭력일 때가 있다. 그래서 언제나 완패이다.


동생도 사정을 잘 알기에 더 이상 내려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이번에도 내가 혼자 올라가겠다고 했다. 몇 달 전에 겨우겨우 설득해서 같이 올라가긴 갔지만 역시나 서울에서 좋지 않았다. 남의 집에 가서도 단 1퍼센트도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고 자기 스타일 대로만 해야 하는 성격과 배려 없는 행동 때문에 모두가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언제나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 몇몇 커플을 봐도 벌어지는 상황을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다. 물론 많이 이혼도 했다. 상처에 허덕이는 건 이상하게도 한국남자들이 더 많다.


그래서 이번 명절에 같이 가자고 말도 안 꺼냈다. 잘못 꺼내면 싸움만 일어날 것이 뻔해서 그냥 혼자 올라가겠다고 했다. 한국이든 어디든 자기 나라 행사라고 크리스마스나 핼러윈은 끔찍하게 챙기면서 우리나라 큰 명절은 그냥 휴일 중 하나로 취급해 버리는 그 태도에 이미 질려버렸다.


하지만 포기했다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뭔가 아프다. 그래서 병들어 버릴 것 같다. 더 걱정되는 건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마치 세상의 정석인 것처럼 엄마를 통해 매일매일 배우는 딸을 보는 게 안쓰럽고 고통스럽다. 한국에 살지만 완벽하게 외국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모든 사건과 일들은 단 한 사람으로 인해 발생한다. 하지만 본인은 절대로 이상하지도 않고 잘못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언제나 지독하도록 한결같다.


자기 입으로 엄마는 위대한 존재라고 그래서 엄마의 자식 사랑은 비교가 불가능한 마치 무슨 특별한 영역 같다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나한테 가장 위대한 존재인 우리 엄마는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게 앞뒤가 안 맞고 불쾌하다. 그리고 이런 대접을 받게 해서 엄마한테 미치도록 죄송스럽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치매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꼴을 당해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 퇴사를 결실하면서 더 단단하게 마음먹기 위해 개인상담까지 받아가면서 절벽의 모서리에서 바둥거리며 올라오려고 애를 쓰고 있던 나였는데 이번 명절에 이 사건은 더 나를 궁지로 몰았다. 그리고 무너져 내렸다.


이런 답답하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남들은 긴 명절이라고 기쁘게 퇴근하는데 난 불편하게 퇴근길에 올랐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참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내 몸에 모든 세포들이 내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이 삶을 지속하면 병들지도 모른다. 너부터 챙기라고 강하게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하지만 꾸역꾸역 딸아이를 생각하며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럼에도 발걸음이 무거워 잠시 휴대폰을 열어 페이스북을 봤는데 행복하게 아니 어쩌면 명절 차례상 때문에 지친 표정으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지인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사진들을 보니 행복했던 어린 시절 명절 기억이 떠올랐다.


내 기억 속에 명절은 언제나 따뜻했다. 물론 분주하고 정신없기도 했다. 엄마는 뭔가 챙기기 정신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더 깔끔하게 보이게 하려고 나와 동생을 옷을 몇 주 전부터 준비해서 단정하게 입혔다. 아빠는 오랜만에 할머니를 뵈러 가는 것과 형들을 만나는 것에 들뜬 그런 느낌이었다. 엄마가 출발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언제나 재촉을 했고 약간의 다툼은 마치 통과의식과 같았다. 그럼에도 차속에서의 부모님의 대화는 거북하지 않았다. 다른 친척들의 근황부터 어른들 챙기는 것 그리고 친척들 자식들 소식까지 정신없이 정보를 공유하곤 하셨다.


친척이 많아서 그런지 도착하면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과 어린 그룹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지쳐서 좁은 방 이곳저곳에 공간을 찾아 잠들곤 했다. 특히 설날은 추석보다 더 좋았다. 왜냐면 세뱃돈을 받는 설렘 때문이었다. 어느 큰 아버지는 새 돈을 준비해서 같은 만원 한 장이라도 받는 우리들의 기분을 더 좋게 만들어 주시기도 했고, 철저하게 서열을 정해서 세뱃돈을 차등해서 주는 어른들도 있었다.

덕담도 듣고 돈도 받고 그래서 시간이 흘러가는 게 언제나 아쉬웠다. 하지만 내가 아빠가 된 지금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이 행복한 명절은 현실에서 실종되어 버렸다.


내가 가족에게 실망하거나 옛날을 그리워하거나, 엄마 한 죄송스러운 모든 것을 보다 형 집에 내려오라고 말해 줄 수 없어서 동생에게 미치도록 미안하다. 엄마를 혼자 모시면서 형수란 사람한테 그 어떠한 고마움의 표현도 한 번 받지 못하고 이런 대접을 받게 만들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동생 혼자 이 모든 짐을 지게 만들어버렸다. 참으로 못난 형이다. 내려오겠다는 말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이런 삶을 경험하게 해서 더 죄스럽다.


나는 가족의 그 발언이 여전히 불쾌하다. 우리 엄마는 조금 아픈 것뿐이다. 치매라고 무슨 전염병 환자나 맹수처럼 위험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인지 참으로 이해가 안 된다. 그냥 덜 성숙한 인간 그 자체로 보인다. 


그래서 평범한 가정 중 조금의 다툼은 있지만 안타깝게 늙어가는 서로의 부모를 아껴주고 보살피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다. 결혼했다는 이유로 양쪽 부모님을 챙기려고 나름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만약 내 가족이 그랬다면 아마도 세상에 별이라도 다 따줄 만큼 환장하게 이뻤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질 수 없는 현실이라서 그래서 최근 몇 년 전부터 나는 명절이 싫어졌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냥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래야 서운함도 사라질 것이고 부럽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덜 미울 테니까 말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이렇게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품고 소중한 시간을 날리고 있으니 남은 인생에게도 미안하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동생과 엄마를 보러 혼자라도 이번 명절에 올라가려고 한다. 중증치매지만 그래서 설날도 모르지만 그래도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서 마음의 평온을 찾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봉합하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잘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조촐한 명절음식을 만들어 같이 먹으려고 한다. 마치 솔로인 것처럼 그렇게 그곳에서 24년도 설날을 보내려고 한다.


물론 내가 떠나면 딸과 가족은 아주 행복한 휴가를 보낼 것이다. 어쩌면 휴양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편한 시간을 보낼 것이 뻔하다. 하지만 미워할 마음조차 낭비이고 그럴 힘도 없다. 단 한 가지 매듭이 풀 수 없다면 줄을 끊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딸을 생각하는 마음에 망설이는 내가 겁쟁이같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살기 위해 이 줄을 스스로 끊게 될 거라는 것을. 그때가 되면 이런 서운함도 그냥 인생 앨범의 어떤 한 페이지로 남아서 훌훌 털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푸념을 엄마 이야기를 쓰는 이 소중한 공간에 남기는 현실이 참으로 싫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는 것이 더 가슴 아프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특히 가족 중 치매로 고생하느라고 명절이 조금 어두운 분들이 계신다면 응원하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그 시간을 부여잡고 있을 누군가가 분명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미 불이 다 꺼져버린 그래서 너무나도 적막한 연휴 전날, 키보드 소리가 이 집안에서 가장 큰소리로 울려 퍼지는 이 공간에서 이렇게 조용히 속삭인다.


"엄마 아들이 세배하러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나중에 며느리는 몰라도 딸이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손녀딸도 데리고 갈게요. 이번에 못 데리고 가서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올해도 새 해 복 많이 받으셔야 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motherstory

https://brunch.co.kr/brunchbook/mylifeis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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