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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ul 17. 2024

69. 형, 올라와야 할 거 같아. 엄마가 걷지 못해.

엄마에게 휠체어가 생겼다. 

잦은 두통으로 고통을 호소하던 동생이 입원해서 정밀 검사를 받기로 했다. 부모님에게 겉모습은 멀쩡한 나름 적당한 키와 덩치를 선물 받은 우리 형제지만 속은 솔직히 부실했다. 나와 동생은 연약한 뼈와 뭔가 부적절한 배치로 인해 허리와 목 디스크의 고통에 시달렸다. 덕분에 힘쓰는 운동에 아주 취약한 그런 존재였다. 조금만 무리해도 금방 고통으로 쓰러졌다. 그럼에도 적당히 요리 저리 피하고 견디어 가며 36년과 41년을 버텨왔다. 그런데 내부의 문제를 떠나서 동생의 두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미뤄왔던 검사를 직장 상사의 도움으로 입원해서 내시경과 머리검사를 동생은 다행히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다고 하면 불안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엄마도 아빠도 검사를 받고 좋은 결과를 들은 적이 없었다. 


주의라도 받았다면 이토록 무섭지는 않았을 텐데 극단적인 결과를 통보받고 우리 가족들은 언제나 힘들어했다. 그래서 동생은 나름 걱정하는 듯했다. 태연하게 괜찮을 거라고 안심을 시켰지만 나 또한 설마라는 생각을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그래도 아직 삼십 대인데 뭔 일이 있겠어 싶었다. 


그보다 걱정인 것은 하루 입원하면 엄마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미리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고(아마도 올라오게 하는 것이 미안했을) 그래서 동생의 여자친구가 엄마를 픽업해서 하룻밤 보낸다고 나중에 듣게 되었다. 


항상 고마운 동생 여자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다행히 동생의 검사결과는 큰 이상이 없었다. 예민한 성격으로 인한 두통이라고 했고, 위와 대장도 깨끗하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자 나름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두통이었다. 아마 예민하다는 진단보다는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이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를 모시고 사는 동생이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사소한 일들을 모두 말하지 않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왜냐면 나 또한 엄청나게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누구보다 동생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 중 거의 최고 등급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덕분에 인생은 항상 걱정 투성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두통을 심각하게 느꼈던 그 기간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성이 생겨서 이제는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나쁜 소식이 없다는 것은 숙면에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푹 잠을 자고 눈을 떴는데 일어나서 얼마 지나고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불안했다. 보통 우리가 통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대를 벗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좋지 않은 소식이 있었다. 


"형.. 올라와야 할 것 같아.."


역시나.. 뭔 일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다스리고 이유를 물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일이 기를 바라면서.


"엄마가 걷지를 못하네.. 어디서 다쳤는지 모르겠는데 발목에 멍이 들어서 걷지를 못해. 어제 센터에서 와서 잘 때까지 잘 걸었다고 했는데..."


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센터에서 다쳤을 것이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보호자에게 알려줘야 할 텐데 그런 절차는 생략된 듯했다. 흥분보다 중요한 것은 대처였다. 나는 감정을 다스리고 차분히 증상을 물어봤다. 일단 멍이 심하게 들었고, 엄마가 서 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어젯밤에 엄마와 시간을 보내 준 동생 여자친구도 당황했을 것이 뻔했다. 일단 동생은 나한테 SOS를 요청하고 긴급하게 회사에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서울로 향했다. 다행인 것은 더 이상 허락받을 직장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걱정은 밀려왔다. 왜냐면 엄마의 신체는 이미 더 이상 약해질 것 없을 정도로 쇠약했다. 근육은 모두 증발되어 얇은 가죽만 뼈에 겨우 붙어 있었다. 뭔가 다치면 회복이라는 것 자체가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가끔 대화할 때 동생과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엄마가 걷지 못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본방이 시작된 거라고. 지금은 예고편에 불과하다고. 본방이라는 말로 표현을 꾸며도 그 현실이 처참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본방이 시작되는 것만 같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해서 엄마 방문을 열었다. 동생이 휴가를 내서 간단한 응급조치를 끝낸 상태였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고 일단 골절이 없다는 것은 확인했다고 했다. 세부적인 검사는 못했지만 우선 보호대를 엄마는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TV를 주시하고 있었다. 엄마는 미동도 없었다. 분명 고통받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동생과 짧은 이야기를 마치고 피곤했을 동생에게 빨리 잠을 자라고 했다. 잠시 놀고 있는 형으로써 내일 출근해야 하는 동생에게 미안했다. 밤에 잠을 자는 동안 엄마는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벌써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나와서 냉장고와 씨름을 했을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는 밤새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중증치매라고 해도 고통은 인지하신다. 본인이 움직이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대로 누워만 있었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는 동생을 배웅하고 엄마의 기저귀를 확인했다. 역시나 뭔가 가득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후각이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한다. 몇 번 병원을 가봤지만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만 의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의 대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들어서 화장실로 이동했다. 보통 때라면 저항했을 엄마지만 엄마는 그냥 내 품에 안겨서 웃기만 했다. 


본인도 이 상황이 웃겼던 거 같다. 나는 9살 딸보다 가벼운 엄마를 화장실 의자에 올려두고 샤워를 시켜드렸다. 아들 마음 아픈 것을 아는지 엄마는 스스로 세수도 하며 나를 도왔다. 의자에는 변이 묻었지만 그렇게 더럽지는 않았다. 단지 매일 엄마를 샤워시키고 있는 동생이 떠올랐다. 


이 놈은 전생에 무슨 대역죄를 지었길래 이런 고생을 하며 아름다운 삼십 대를 보낼까 생각했다. 전생 이야기를 동생과 종종 한다. 믿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농담 삼아하게 되었다. 나는 대역죄라고 표현하고 동생은 전생에 너무 행복했기에 이렇게 현생에서 고생한다고 표현했다. 나보다 긍정회로가 더 발달한 놈이라는 사실이 전생 이야기에서도 드러났다. 과거에도 고통스러웠다고 가정하는 나와, 과거에 미친 듯이 행복했기에 지금 고생한다고 생각하난 동생. 결과론적으로는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동생의 이론이 조금 더 듣기 좋았다. 


엄마를 씻겨드리고 다시 알몸의 엄마를 들어서 방으로 왔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혀드렸다. 엄마는 기운이 없는지 쓰러져가는 빗자루처럼 침대로 몸을 눕혔다. 나는 냉장고에서 동생이 사둔 멜론을 잘라서 엄마한테 가져갔다. 보통은 과자에 집착하는 엄마지만 멜론은 잘 드셨다. 


누워서 잘라진 멜론을 입으로 넣는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엄마가 건강하실 때 멜론을 좋아했었나?'


참 못난 자식이 여기 있었다. 엄마가 도대체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엄마가 무슨 색깔을 좋아했는지, 어느 도시를 사랑했는지, 무슨 차를 즐겨 마셨는지, 어떤 것들을 가지고 싶었는지 잘 아는 게 없었다. 나름 엄마랑 몇 시간씩 통화를 하며 수다를 떨던 나였는데,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엄마는 우리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우리 걱정에 혼자 밤잠을 설치고 어설프게 커버린 두 아들 눈치를 종종 보면서 힘든 일이 생겨도 참고 참았던 미련한 우리 엄마. 


나는 멜론을 먹는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촉촉한 물기가 내 손에 옮겨졌다. 


잠든 엄마를 두고 거실로 나왔다. 집에는 나 혼자 있는 것만 같았다. 몇 주전에 서울에 왔을 때 엄마가 계속 돌아다녀서 귀찮아했는데 이렇게 그 모습이 빨리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뼈가 이상 없다고 해도 엄마는 당분간 걷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만약을 대비해야 했기에 나는 서둘러서 휠체어를 검색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계속 누워만 있어야 할 텐데 그러면 계속 힘든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이것저것 찾아서 일하고 있는 동생에게 보냈다. 그리고 휴대가 편리한 휠체어를 주문했다. 

그것도 로켓배송으로 선택했다. 엄마가 답답해 보이기도 했고, 주말에 동생과 엄마를 모시고 외출이라도 하려면 필요했다. 이런저런 일을 경험하니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나름 긍정적인 부분을 찾는 기술이 생겼다. 


나는 엄마가 편하게 앉아서 마트를 돌아다닌 모습을 상상했다. 치매라는 것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속에 사는 모습이 존재한다. 우리 형제가 생각했던 좋지 않은 모든 일들이 하나씩 벌어지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9월이면 엄마가 요양원에서 나온 지 1년이 된다. 그 사이에 변기세정제를 먹어서 입원도 했고, 엄마가 실종되기도 했다. 물론 크고 작은 일은 매일 발생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1년이라는 시간을 영원히 남겼다. 


내가 남기는 글을 보고 많은 분들이 우리 형제를 응원해 주고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댓글로 표현해주시기도 했다. 효도는 셀프이고, 온전하게 살아있는 너희들 인생을 살라고 말해주시는 분들도 많다. 물론 고생은 동생이 다하고 있기에 동생의 해방을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나는 어쩌면 중립적인 입장일지도 모른다.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비상상황에 투입되거나 엄마방에 설치한 카메라로 누워있는 엄마를 훔쳐보는 것뿐이다. 


사실 마음이 너무 무겁다. 엄마의 회복이 늦어질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걷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이어짐을 알고 있다. 그나마 걷기에 냉장고와 데이트도 하실 수 있는 건데 그래서 과자라도 먹으니 이 정도 체중이라도 유지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얼마나 아픈지 엄마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들의 마음이 절대 편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해 본다. 언젠가는 미친 듯이 그리워질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빨리 회복될 거라고 확신한다. 


왜냐면 우리 엄마는 우주에서 가장 강한 여자니까.   





https://brunch.co.kr/brunchbook/mymotherstory

https://brunch.co.kr/magazine/dontforge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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