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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HSP)으로 생존하며 살아가기.

난 언제나 옳다. 하지만 넌 틀리다.

by 고용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민감함의 방향이 달라짐을 느낀다. 타고난 기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기질도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다. 나는 어릴 적부터 주변 눈치를 많이 보고, 누군가 나를 공격하거나 무례하게 대하면 과하게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러나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직장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러한 민감함은 조금씩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전보다 반응의 강도가 줄어들었고, ‘조금 덜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변화의 핵심에는 자기 성찰이 있었다. 특히 사람의 태도와 말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특성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거듭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응은 단순히 성격이라기보다는 나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한 기질적 생존 전략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실제로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Elaine Aron)은 전체 인구의 약 15~20%가 선천적으로 높은 감각 민감성을 지닌 ‘HSP(Highly Sensitive Person)’로 분류된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 범주 안에 속하는 사람이다.

가끔 나처럼 아주 민감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외형이나 대화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조금 가까워지거나 함께 협업을 하게 되면 그들은 금방 드러난다. 사람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극에 쉽게 소모되고, 말 한마디에도 오래 반응이 남는다. 어떤 사람은 예순이 넘어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 크게 동요하거나, 공격적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립과 회피를 반복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도망친다’거나 ‘비겁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HSP들에게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자기 생존이 걸린 문제다. 자극에 민감한 사람에게 억지로 큰 소리와 갈등, 낯선 상황에 노출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적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신체, 나의 에너지가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다.

예민함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환경에서는 그것이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던 거대한 조직 사회에서 20년 넘게 생활했다. 인사 이동은 잦았고,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했다. 나는 그 속에서 예민함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활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의 기질, 감정, 반응을 재빨리 읽어내고 그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때로 ‘배려심이 깊다’, ‘눈치가 빠르다’,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고 표현하곤 했지만, 사실 그것은 나에게 생존 본능이었다. 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그 조직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민감함은 언제나 유용한 것은 아니다. 특히 목적이 ‘친목’이거나, 특별한 생산성이나 성취가 없는 소소한 모임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대화가 많고, 간섭이 잦은 활동은 HSP에게 결코 소소하지 않다. 그래서 나처럼 예민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방어벽이 보장된 활동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독서 모임처럼 혼자서 할 수 있고, 간섭이 적고, 말이 적은 모임 말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맞고, 넌 틀려’라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몸의 모든 신경이 반응한다. 누군가가 모든 것을 확신에 차서 주장할 때, 특히 그것이 근거 없는 자신감일 때 더욱 그렇다. 마치 그 확신 자체가 나를 무시하거나 짓밟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때로는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은 곧 ‘현실’이 된다. 틀린 말을 해도 주변에서는 옳다고 받아들이고, 아부와 추종이 따르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한다. 내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서다. 결국 예민한 나만 피곤해지고, 나만 고갈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나처럼 민감한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종종 피곤함을 느낄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언제 감정이 상할지 예측하기 어렵고, 사소한 일로 오래 반응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나는 ‘내가 무조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언젠가 운이 좋아서 내 말에 영향력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된다면 나는 그 자리에 서서도 “나도 틀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관대한 까칠함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것이 민감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나의 유일한 다짐이다.


민감함은 결코 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더 깊이 느끼는 감각이고, 관계의 미세한 파장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그 민감함을 소진되는 방식이 아니라, 의미 있는 연결을 위한 도구로 써나가는 일이다. 예민함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동시에 타인과 다정하게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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