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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an 12. 2021

아버지 때문에 결혼했다.

주차장에서 프로포즈를 하다.

그가 남기고 간것 (다문화 가족의 탄생)


  아버지가 떠나고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금발의 외국인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국 문화가 무엇인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여자 친구였다. 아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그 옆에 앉아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대화를 들으면서 자리를 지켜주었다.

     

  친척들은 신기한 듯이 관심을 가졌다. 내가 잠시 다른 손님들께 인사하러 나오면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보기 정신없었다. 그때는 모든 상황이 다 싫었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여자 친구는 대충 검은색을 입어야 한다는 말을 한국 친구에게 전해 들었던 거 같다. 하지만 신발은 슬리퍼를 신고 장례식에 왔다. 발인을 할 때도 슬리퍼를 신고 산을 올라갔다.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이 웃기는지 계속 말을 걸었다. 식사를 할 때 친척들이 수군거리면 우리 커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러다 캐나다로 떠나는 거 아니야? 차라리 저 여자 애랑 잘 돼서 떠나면 좋겠다. 고생도 이만 저만 했는데 캐나다 가서 살면 좋을 거 아니야.”     


  비겁하게 도망가기 위해서 결혼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장 힘든 시간에 옆에 있어주니 나도 여자 친구가 다르게 보였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외국인이랑 평생을 같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몇 번의 유학 경험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해외가 나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왠지 답답하고 그 지겨웠던 한국이 항상 그리웠다. 그리고 정서가 다른 사람들과 내가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알았다. 처음에 영어를 배운다는 목표 하나로 무서울 것 없이 외국인을 찾아다녔다. 내가 배우고 연습한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 나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가족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프러포즈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 지금 떠나면 여자 친구도 내가 떠난 후 며 칠 후에 학위를 마치러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거 같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무턱대로 종로 보석 상가로 향했다. 막상 도착을 하니 반지를 구입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앞을 계성 서성였다. 확신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앞에 있는 운세를 봐주는 집으로 들어갔다.      


  무엇을 봐드릴까요?라는 말에 나는 말했다.


“제가 외국 여자랑 결혼을 하면 잘 살 수 있나요?”


나의 사주를 확인하고 그분이 말을 했다.

“아무렴 힘들겠죠?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데 아마도 당신은 잘 견디며 살 수도 있을 거 같네요.” 무엇인가 찜찜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묻고 싶었다. 나라서 잘 버티고 산다는 말의 의미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건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그냥 돌아갔다.

      

  다음날 머릿속에 계속 결혼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나는 다시 종로로 향했다. 이제 3일 후면 다시 미국으로 가야 했다. 마음은 너무도 조급했다. 대충 인터넷으로 후기를 확인하고 보석집을 들어가서 프러포즈 반지를 주문했다.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그동안 걱정했던 것들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떠나기 하루 전날 여자 친구를 만나서 근사한 한강변의 레스토랑을 갔다. 멋진 멘트와 함께 청혼을 하려고 했는데 결국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지는 내 주머니에서 잠자고 있었다. 나는 시기를 놓치고 초초해졌다. 결국 차를 타기 직전에 한강 주차장에 반지를 전해주었다. 참으로 멋없는 프러포즈였다.      


  반지를 받자 여자 친구는 너무도 좋아했다. 생각보다 너무 행복해는 모습을 보면서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계속 아버지를 떠올렸다. 왠지 아버지의 죽음이 나의 결혼을 부축인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버지 장례식장에 그 당시 여자 친구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프러포즈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모든 친척들의 관심과 여자 친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결혼을 갑자기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해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청첩장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넣었다.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만약에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했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말 뒤에서 많이 자랑하고 다니셨을 아버지였다. 큰 애가 외쿡인이랑 결혼을 했다고.



저자의 책으로 가족과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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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goo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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