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사람의 선택
육아와 직장 그리고 투자에 시간을 분배하며 2018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조금 더 풍요로운 40대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버텨낼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고단함이 언젠가는 보상으로 돌아올 거라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서 떨림과 두려움을 느껴졌다. 말의 내용보다 먼저 감정이 전해졌다. 평소와 다른 기운이 전화기 너머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형…. 휴가 낼 수 있어?”
“왜? 엄마 무슨 일 있어?”
“엄마 쓰러졌어. 지금 응급실이야….”
“부대에 보고하고 최대한 빨리 갈게.”
“운전 조심하고….”
전화를 끊고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쓰러졌다’는 말 하나가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엄마 체중이 너무 빠져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거라고 했다. 위의 대부분을 절제하니 식욕도 자연히 사라졌다. 억지로 먹어도 속에서 받지 않아 고통스러운 일이 반복되었다. 틈틈이 고단백 영양 음료를 보내드렸지만 큰 도움이 안 되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엄마의 신호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급한 마음에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4시간을 운전해 서울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동생이 말한 물품을 싸기 위해 이곳저곳을 뒤졌다. 엄마 방에서 입원에 필요한 물건을 찾던 중 누가 봐도 열어보고 싶게 생긴 작은 상자가 서랍장 안에 있었다. 상자를 집어 들고 잠시 앉아 열어보았다. 이 상자를 열어도 되는 걸까 잠시 망설였지만,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아빠가 선물했던 귀금속과 어릴 적 찍은 우리 형제 사진들, 그리고 작은 봉투 하나가 있었다. 그 속에는 현금 200만 원과 작은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현금을 보면서 결혼식 전날을 떠올렸다. 기억은 언제나 가장 마음이 약해졌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아들, 이거….” 그때 엄마는 부끄러운 듯 내게 돈 봉투를 내밀었었다.
“이게 뭐예요?”
“미안해. 엄마가 항상 미안하고 고맙고….”
“돈 필요 없어요. 뭐 이런 걸 줘요.”
“그래도 새아기랑 뭐 좀 사서 먹고 너희 필요한 것도 사.”
“아니야. 아들 집이 두 채야. 알죠? 엄마 가지고 있다가 임플란트 할 때 써요. 나 이 돈 안 받으니까. 넣어둬요.”
그때는 그 말이 효도라고 믿었다. 거절하는 것이 엄마를 위한 선택이라고 확신했다. 서운한 표정으로 엄마는 돈을 다시 돌려받았다. 엄마를 위해서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냥 고맙다고 잘 쓰겠다고 웃으면서 받으며 포옹이라도 해드렸어야 했다. 그게 그동안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었는데 미련했다. 받지 않음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뭐 하나 내세울 것 없이 그것도 스몰 웨딩으로 결혼하는 우리 커플을 보고 엄마는 계속 미안해했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캄캄한 반지하 단칸방에서 동거로 살림을 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그 초라했던 삶을 대물림하는 것만 같아서 가슴 아파하는 게 느껴졌다. 엄마의 미안함은 늘 말보다 표정에 먼저 묻어났다. 한참 200만 원을 바라보다가 다시 봉투에 넣고, 색이 바랜 누런 메모지를 빼서 펼쳤다. 엄마의 손 글씨로 쓰인 글이 남아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실수하지 말자.
무엇을 결정할 때는 신중히 생각하고 하자.
다시는 아들 눈에 눈물 나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열심히 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 아들 건강에 신경 쓰는 현명한 엄마가 되자.
아이들한테 짐이 되는 엄마가 되지 말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해결할 줄 아는 엄마가 되자.
늘 자식 걱정하며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엄마가 되자.
글씨 하나하나에 눌러 담긴 엄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누런 종이의 상태를 보니 언제쯤 엄마가 썼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가 주유소에서 세차 일을 시작하고 몇 년쯤 지나 우리의 도움으로 빌라도 사고 잠시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어두웠던 과거는 뒤로하고 모두 밝은 희망을 보며 달리고 있었다. 나 또한 희망을 찾아 유학길에 올랐고, 복직 후 다시 하나씩 쓴 돈을 채우며 적응하고 있던 어느 날 놀란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문득 떠오른 대화들이 나의 걱정을 앞당겼다. 혹시나 뭔가 잘못되었을까 봐 가슴이 철렁했다. 괜한 기우이기를 바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손녀딸을 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아직도 엄마랑 하고 싶은 게, 못 해 드린 게 너무나 많았다. 시간은 늘 충분하다고 착각해 왔지만,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며칠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밀하게 검사를 했다. 뭐 하나 할 때마다 돈 걱정하는 엄마의 모습이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했다. 검사 결과보다도,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엄마의 말투가 더 아프게 다가왔다.
“엄마. 돈, 돈, 돈 하지 말아요. 돈 안 쓰고 열심히 투자하고 그런 것도 다 이럴 때 원 없이 쓰려고 한 거니까. 비용 얼마 안 나왔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건강만 생각하자. 엄마. 응?” 내 말이 엄마를 안심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 미안하게 만들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그래 그래. 고마워. 우리 아들. 점쟁이가 남편 복은 없어도 자식 복은 있다고 했는데 참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근데 부모를 잘못 만난 우리 아들들은 무슨 고생이냐…. 너희가 참 복도 없지.” 엄마의 말은 늘 이렇게 끝이 자신을 탓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 김 여사가 아프긴 많이 아프신가 보다. 그리고 자식 복은 무슨…. 속만 썩이는 징글징글한 놈들인데…. 이상한 소리 마시고 이거 좀 더 먹어봐요. 엄마 좋아하는 홍시야.” 웃으며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여러 번 무너지고 있었다.
엄마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초조했다. 아니 두려웠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몇 주는 걸린다고 했다. 기다림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퇴원을 하고 두 아들과 엄마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엄마한테 메모장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냥 내 가슴에 묻어두었다. 마치 엄마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글은 꺼내 보이는 순간, 그 의미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내 딸에게는 그런 부모가 되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이 메모는 엄마의 다짐이자, 나에게 건네는 조용한 유언처럼 느껴졌다. 같이 영화를 보고 쇼핑도 하고 엄마 좋아하는 음식도 사드리면서 검사 결과에 대한 걱정을 떨치려고 애를 썼다.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마음 한편은 늘 결과를 향해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기 전 아버지 납골당을 혼자 갔다. 누군가에게는 해야 할 의식처럼,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자리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빠. 거기 있으니 편하세요? 엄마가 아파. 아빠가 고생만 시키고 떠나서 엄마가 아픈 거 같아.” 원망인지 부탁인지 모를 말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세상 편한 웃음을 띠고 있는 아빠의 사진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웃음이 더 이상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얼굴처럼 느껴졌다. 한 줌도 안 되는 재가 되는 허망한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도 어쩌면 올바른 선택이 아닐까?
아빠의 삶을 부정하면서도, 이해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스스로가 낯설었다. 누구 말대로 끔찍하게 아껴 쓰고 투자해서 얼굴도 모르는 사위 놈 좋을 일만 시키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믿어온 ‘옳은 삶’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진을 보며 아빠한테 하늘나라에서 좀 도와달라고 불쌍한 엄마 오래오래 살면서 손녀딸 크는 것도 보고 두 아들한테 호강도 받으면서 남은 시간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날만큼은 자존심도, 원칙도 모두 내려놓고 기도했다.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가 느리게 느껴졌다. 속도를 내고 싶어도, 마음이 앞서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의 메모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휴게소에 들러 네이버 부동산 앱을 눌렀다. 어느 순간 습관이 되어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다. 길을 걷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주변 아파트 시세를 확인하곤 했다. 투자를 한 곳이든 그냥 관심 지역이든 항상 현장에 있는 것처럼 투자의 감을 유지하고 싶었다. 이 습관이 나를 여기까지 버티게 한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부동산 거래는 주식처럼 빈번하게 많이 할 수 없어서 사소한 습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삶을 관리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었다. 주변에서는 맨날 뭘 그렇게 쳐다보냐고, 어차피 사지도 못할 거 마음만 아프지 않냐고 하지만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의 시세를 아는 것은 중요했다. 적어도 나는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필요했다. 다시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내려가다가 잠시 차를 세웠다. 그날만큼은 숫자보다 사람을 먼저 떠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말부터 유난히 평택이 내 눈에 들어왔었다. 눈을 사로잡은 곳은 삼성 반도체 공장 근처에 빈 땅들과 주변 일부 대단지 아파트였다. 그 시기 내 마음은 늘 어디론가 향해 있었고, 평택은 그 갈증을 자극하는 이름처럼 느껴졌다. 지제역에 차를 세우고 머리도 식힐 겸 주변을 둘러보았다. 2017년 분양한 평택센트럴자이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2억 중반대에 분양한 가격은 나름 저렴해 보였다.
숫자를 바라보는 눈보다, 가능성을 가늠하려는 감각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역과의 거리가 조금 신경 쓰였고, 주변이 휑하고 텅 빈 게 거슬렸지만, 천천히 걸으면서 둘러보았다. 불편함과 기대감이 동시에 마음속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김포 신도시 개발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텅 빈 곳이 채워지는 것을 본 경험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판단을 지탱해 주는 근거처럼 떠올랐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떤 것들이 들어오고 어떻게 변할지 그려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미래에 매력 있을지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추며 주변을 보았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앞당겨 살아보는 것이 내 임장의 방식이었다.
사실 내게 임장은 산책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기분 좋은 산책이었다. 몸은 걷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몇 년 뒤를 향해 있었다. 단지에 도착한 나는 습관처럼 단지 안으로 들어가 지금 내가 여기서 사는 상상을 해보았다.
이 상상은 투자 판단이기 이전에, 삶에 대한 질문이었다.
‘과연 좋아질 것인가?’, ‘투자가 아니고 실거주로 내 가족이 여기 살아도 좋을까?’
‘실제로 살면 뭐가 불편할까?’ 질문은 곧 책임으로 이어졌다. 나 혼자만의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이 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늘 높게 들어선 깨끗하다 못해 약간 썰렁한 단지를 빠져나와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돌아가는 길이 오히려 익숙했다. 2시간을 더 운전해서 집에 도착하니 딸아이는 자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아내를 포옹하고 자는 딸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풍경 앞에서는 어떤 계산도 의미를 잃었다. 모든 힘겨움과 고통을 한순간에 행복으로 바꿔주는 마법의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자식이었다.
그래서 더 흔들릴 수 없었다. 아내에게 그동안 어떻게 보냈는지 전화로 못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차마 내려오는 길에 임장을 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괜히 말 꺼냈다가 또 다른 짐을 얹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노트를 펼쳤다. 어느 순간부터 부동산 임장을 하면 언제나 짧게라도 기록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록은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아무 생각 없이 매수했던 1호기, 발품 팔고 또 팔아서 겨우 흥정으로 산 엄마 집,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급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산 분양권 2호기를 거치면서 나름 단단해져 있었다. 성공보다 실패가 나를 더 빠르게 단단하게 만들었다. 일찍 투자를 시작했다고 자만했던 시간에 대한 벌을 단단히 받고 배운 것은 그냥 일찍 투자를 시작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시기보다 중요한 건 태도라는 걸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집을 사는 건 장난이 아니었다. 정말 신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시간과 분석을 통해 확신을 두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워나갔다. 그 확신은 언제나 쉽게 오지 않았다.
임장일기[평택 지제역]
지제역 근처가 탐이 난다. 서울과의 거리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주변에 많다. 일자리는 곧 삶의 지속성을 의미한다. 지제역은 현재 1호선과 SRT가 다니고 있고 앞으로 충분히 교통망이 좋아질 것만 같다. 삼성이 있는데 역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다. 집값은 상대적으로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축 아파트라 전셋값이 분양가의 50% 수준으로 투자금이 많이 든다. 하지만 주변 아파트 분양 계획이 있다. 만약 분양하는 아파트를 잡으면 임장한 '자이'보다 역과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일시적으로 물량이 많아지니까 분양권을 잘 사면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고 고덕도 주시해서 보자.
조급함을 경계하자. 주변 부동산에 전화해서 호재나 악재에 대한 분위기를 파악해 보자. 다음에 서울 올라갈 때 또 한 번 들러보자. 특히, 평일 퇴근 시간에 가서 퇴근 차량의 동선을 보고 싶다. 생활의 리듬을 보면 결정에 도움이 된다. 그 동네의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단점이 들어온다. 잊지 말자.
노트에 간단한 내용을 기록했다. 이런 식으로 다녀온 곳들을 정리하면 마치 벼락치기 전에 모범생 노트를 빌린 그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적어도 나는 준비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른 아침부터 임장 노트를 쓰는 나에게 아내가 토스트를 가져다주었다. 엄마 병원을 다녀와서 이 짓거리를 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는 여자랑 사는 게 참 행복했다. 말없이 건네는 토스트가 그 어떤 위로보다 컸다. 출근하려고 옷을 고르는데 아내가 말없이 운동복을 밀었다.
“이거 뭐야? 자기야? 새것인데?”
“응. 자기한테 말 안 하고 배당금 매달 모은 돈으로 샀어. 그냥 공짜다 생각하고 입어. 입고 다니던 거 밑에 바지 지퍼가 고장 났더라고….”
“고마워. 아… 리얼티인컴 배당금? 한 달에 우리 5만 원씩 들어오나?” 암튼 고마워. 잘 입을게.”
아내가 준 옷은 단순한 운동복이 아니라, 다시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갑옷 같았다. 갑옷을 입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괜히 어깨가 조금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부대에 출근해서 옷을 갈아입고 오랜만에 티타임을 가졌다. 2018년부터 다주택자 세금 인상, 투기 규제 지역 강화 등 시끌시끌하다 보니 평소 재테크 이야기도 잘 안 하는 사무실 사람들도 틈만 나면 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불안은 늘 사람들의 입을 벌리고 말로 이어졌다.
“아…. 이번에 저기 아는 선배님 청약됐답니다.”
“어디 어디? 어디가 됐다고 하는데? 어?”
“제2 동탄인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 부럽다. 나는 계속 안 되던데…. 고 상사는 왜 아무 말이 없어?”
“저는 청약은 좀…. 하하. 잘 모르겠습니다.”
“더 오른다는 말들이 많아. 빨리 집 한 채는 해둬야지.”
“저는 익산에 청약 한 번 넣을까 하는데….”
“익산? 왜?”
“부대랑 가깝고 뭐…. 싸고….”
“뭐 잘은 모르지만 왜…. 하필이면…. 도시랑 가깝고 인구도 늘고 그런 곳에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선배님. 저는 그냥 속 편한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대화는 가볍게 흘러갔지만, 말 사이사이에는 각자의 불안과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부대를 옮기고는 철저히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 하지 않았다.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소문으로 고생한다. 그러다 보니 딱히 내게 묻는 사람도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감당해야 할 피로가 눈에 보였다.
부사관이지만 중대장 보직을 맡은 선배는 최근 청약 때문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업무 중 밖에 나가서 사적인 전화를 하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청약이 떨어지면 부대원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기도 했다. 그 모습은 남 일 같지 않았다. 대부분 직업 군인들이 같은 불안을 안고 있었다. 40대 중반으로 정년을 10년 안쪽으로 두었기에 표정과 행동에서 불안함이 느껴졌다. 일터에서 존재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포였다.
나는 그렇게 조용히 주어진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태어나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불필요한 대인관계나 모임, 사소한 만남들을 줄이기 시작했다. 선택과 집중은 생존의 방식이 되었다. 일하는 곳의 사람들이 나쁘다기보다는 집중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음과 체력을 쓸 수 있는 자원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훈련, 야근, 근무 이런 거 저런 거 다 빼고 나면 온전히 퇴근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루를 돌아보면 늘 남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15년쯤 군 생활하다 보니 군인은 철새처럼 돌아다닌다는 걸 깨달았다. 떠나는 순간 관계도 함께 이동한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군인처럼 이동이 잦은 조직은 몸이 떠나면 사이도 급격하게 멀어졌다. 가끔 피할 수 없는 자리가 있을 때만 자리를 채웠다. 억지로 붙들고 싶은 관계는 점점 사라졌다. 그보다 아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었다. 이 욕심만은 어떤 핑계로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열심히 사는 후배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투자하려고 하면 조언은 해주고 싶었다. 내게 반장님이 그랬듯이 나도 그런 쓸모 있는 선배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 반장님은 자산도 많고 경험도 많지만 나의 훈수는 주제넘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괜한 말 한마디가 책임이 될까 봐 두려웠다. 차라리 방관하는 쪽이 더 마음 편했다. 침묵은 비겁함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부대를 몇 번 옮겨도 상황은 비슷했다. 넉넉하지 않았고 일은 항상 넘쳐났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같았다. 출근하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일들로 바빴다. 하루를 쪼개 쓰는 능력만 점점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 규제의 영향으로 부대에서 군 간부 주택 보유 현황을 파악한다는 공문서가 하달되었다. 종종 있던 일이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서류는 내려왔지만, 묘하게 마음이 쓰였다. 군에서 관사를 제공받는 공무원이 근무지 주변에 자가를 실제로 가졌는지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근무 지역 외 아파트 두 채를 표시하고 중대장에게 문서를 보고했다. 그 순간까지도 이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