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릇을 보면 물을 채우고 싶다. 빈 옷장을 보면 옷을 걸어놓고 싶다. 빈 서재가 있다면 책을 넣어두고 싶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텅 빈 공간을 도무지 내버려두질 못한다. 공허한 마음을 애써 달래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광적으로 집어넣아야만 하는 현대인은 오늘도 밑 빠진 독을 채우기 위해 주야장천 애쓰고 있다. 비움은 악덕이요, 채움은 미덕이다. 이토록 가혹한 시련이 또 있겠는가?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희극적인 이야기는 비단 남의 일이 아니다. 언제 도달할지도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목표를 향해 우리는 끊임없이 애쓰며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다.
이러한 현상은 글쓰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빈 종이가 있으면 글씨로 빼곡히 채워넣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공백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 감내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서 공백을 채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쓴 글은, 글쓴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들의 불규칙적인 나열에 불과하다. 백지장을 맞댄다고 철판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좋은 글은 글의 길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글쓰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글이 짜임새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지, 알맞은 어휘와 적확한 문법으로 문장을 완성했는지,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의와 풍부한 예시를 사용해 주제를 설명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글쓰기를 포함한 위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빈 공간을 대하는 개인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을 채워야할 필요는 없다. 삶에서 어떤 것들은 그대로 놔두어야 본래의 가치가 더욱 빛나 보인다.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매달리는 것은 스스로를 고통의 늪에 빠뜨리는 것과 같다. 공백을 여백으로 두고자 스스로 마음먹을 때 비로소 그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
공백을 여백으로 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본다는 것을 뜻한다. 글을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글자 사이에 흰 공간이 남는다. 하지만 이 흰 공간은 글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되려, 글자와 글자 사이에, 단어와 단어 사이에 여유를 두어 글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인생에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아야 한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은 버텨내야 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