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꽃사과나무와 수사해당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의 비해당48영 식물명에 대한 4번째 이야기로 해당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해당은 48영 중 11번째 ‘깊이 잠든 해당 (熟睡海棠)’에 등장한다. 12번째 ‘반쯤 핀 동백 (半開山茶)’과 대가 되는 시이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해당海棠은 대개 장미속의 해당화(Rosa rugosa)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명사십리 해당화로 불리는 이 장미속 꽃의 중국명은 매괴玫瑰이다. 하지만 중국 문헌에서 해당은 사과나무속의 중국꽃사과나무(Malus spectabilis 중국명 海棠花)를 가리키며, 관상수로 많이 재배하는 수사해당(Malus halliana 중국명 垂絲海棠)도 이름이 말해 주듯이 해당화의 일종으로 본다.** 해당은 또한 중국 시가에서 양귀비를 비유하기도 하다. 그 이유는 다음에 인용한 <군방보>의 고사에 잘 설명되어 있다.
“동파東坡의 해당海棠 시에서 ‘밤 깊어지면 꽃이 잠들까 걱정되어 촛불 밝혀 붉은 모습 비춰보네(只恐夜深花睡去 故燒銀燭照紅妝).’라고 했는데, 이 고사는 「태진외전太眞外傳」에 보인다. 명황明皇이 침향정沈香亭에 올라 태진비太眞妃를 불렀는데, 이때에 태진은 새벽까지 취해 깨지 못하였다. 고역사高力士에게 명하여 시녀가 부축해 이르게 하니, 태진은 취한 얼굴에 화장이 지워지고 흐트러진 머리에 비녀는 비스듬하고 재배再拜도 못하였다. 명황이 웃으며 ‘어찌 비가 취한 것이겠는가. 해당이 잠이 부족한 것이지.’라고 말했다.”***
「태진외전」은 당 현종이 총애한 양귀비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해당은 ‘술에 취해 잠든 양귀비’를 뜻하는 시어가 된 것이다. ‘숙수해당熟睡海棠’은 ‘깊이 잠든 해당’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시 제목은 마치 이 양귀비 고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렇다면 48영의 해당은 ‘중국꽃사과나무’ 류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해당화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꽃이고, 조선 초기의 문신 성현成俔(1439~1504)이 '매괴玫瑰'라는 시제로 해당화가 “독서하는 책상 가까이에 피었구나(開近讀書床)”라고 노래했듯이 고려시대부터 문인들이 즐겨 가꾸었던 꽃이다. 당연히 비해당 당시에 정원화로 사랑받았을 것인데, 이 해당화가 48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다.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조선 초기의 문인들은 해당화의 중국명이 매괴玫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성현의 시에서 “한 떨기 매괴 나무, 사람들은 이를 해당화라고 하네 (一朶玫瑰樹 人傳是海棠)”라고 읊은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강희안姜希顔(1417~1465)도 <양화소록>에서 “세상 사람들은 꽃 이름과 품종에 대해 익히지 않아서, 산다山茶를 동백冬柏이라 하고, 자미紫薇는 백일홍, 신이辛夷는 향불向佛, 매괴玫瑰는 해당海棠, 해당은 금자錦子라고 한다.”라고 했다. 당시에 ‘중국꽃사과나무’ 류인 중국의 해당을 민간에서 ‘금자錦子’로 불렀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비해당48영에 화운한 15세기 문인들은 대개 중국의 해당과 매괴를 구분했고, 매괴가 우리나라 속명으로 해당화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제 해당화와 중국꽃사과나무, 수사해당에 대해 각각의 특성을 간략히 살펴본 후 ‘숙수해당’ 화운 시 내용을 분석하면서 48영의 해당이 무엇인지 추정해보자. 해당화는 높이 1.5~2m가량 자라는 낙엽 관목으로 복엽이며 줄기에 가시가 많고 5~7월에 주로 홍자색 꽃이 핀다. <중국식물지>에서는 중국꽃사과나무(Malus spectabilis 海棠花)에 대해 높이 8m가량 자라는 교목으로 잎은 5~8cm가량의 타원형 혹은 장타원형이며, 4~5월에 분홍색 꽃봉우리에 흰색 꽃이 피며, 자그마한 사과 같은 황색 열매는 직경 2cm이며 꽃받침열편이 남아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에 식재하는 수사해당(M. halliana)은 5m가량 자라는 소교목으로 산방화서에 직경 3~3.5츠인 연한 홍색 꽃이 피며 꽃잎의 기부는 분홍색이다. 열매는 지름 6~8mm의 배 모양으로 꽃받침열편은 탈락한다. 교목 혹은 소교목인 중국꽃사과나무나 수사해당의 꽃잎은 벚꽃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진다.
이제 ‘숙수해당’이라는 제목으로 화답한 문신들의 시에서 식물의 특징을 기술한 것 위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東風裊裊海棠花 봄바람이 한들한들 해당화에 불어오니
開遍春階手可挐 봄 섬돌에 두루 피어 손에 잡히네
성종대왕成宗大王 어제의 구절이다. 꽃피는 시기가 한창 봄날이므로 해당화보다는 꽃사과나무를 노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사실 성종대왕은 이 시에서 “옥진의 교태는 침향정에서 잠들만 하고 (玉眞嬌足沈香睡)”라고 하여, 양귀비의 침향정 고사를 직접 인용함으로써, 숙수해당이 중국꽃사과나무 류임을 말해주고 있다.
(2) 三月春將暮 3월이라 봄은 저물어가는데
開於第一花 제일가는 꽃이 피었네
…
帶雨頹繁錦 빗줄기에 무수한 비단이 흘러내리니
迎風疊晚霞 바람 맞아 저녁 노을에 쌓이네
김수온金守溫(1409~1481)의 식우집拭疣集에 실려있는 ‘숙수해당’의 몇 구절이다. 여전히 음력 3월은 양력으로 하면 4월 중순에서 5월 초순 무렵이다. 아직 해당화가 피기에는 이른 계절이다. 이 시에서는 꽃잎을 비단(錦)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꽃잎이 비를 맞아 무수히 떨어지고 바람에 쓸려 쌓인다고 했으니, 이는 분명 해당화 꽃이 아니라 서부해당이나 중국꽃사과나무류의 꽃을 묘사했다. 특히 <양화소록>에서 속명으로 언급한 ‘금자錦子’의 글자가 꽃 묘사에 사용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3) 端合神仙號此花 이 꽃은 신선이라 불리는게 마땅하리
自餘妖艶浪紛挐 요염하게 흩날리며 손끝에 스치네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1409~1474)의 ‘숙수해당’ 중 첫 구절이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해당화를 꽃 중의 신선(海棠 爲花中神仙)’이라고 했다, 이 시에서도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 해당은 중국꽃사과나무 류에 가깝다.
(4) 移栽一片繁華地 번화한 땅 모퉁이에 옮겨 심으니
粧得三春富貴家 춘삼월에 부귀한 집안 단장해주네
허백정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이 지은 ‘숙수해당熟睡海棠’이다. 이 시도 춘삼월은 해당화가 피기에는 이른 시절이다. 수사해당이 만발할 때이다.
(5) 豈以無香小此花 향기 없다고 이 꽃을 어찌 얕보랴
世間紅白謾紛拏 세상의 홍백색 꽃은 부질없이 다투네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지은 시의 첫 구절이다. 채수는 먼저 해당에 향기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장미속의 해당화(R. rugosa)는 향기가 상당히 진하다. 그러므로 채수도 이 시에서 사과나무속의 중국꽃사과나무나 수사해당을 노래했다.
지금까지 ‘숙수해당’을 읊은 시 중에서 꽃 피는 시기나, 꽃잎이 바람에 지는 모습, 꽃 향기를 묘사한 구절들을 몇몇 살펴보았다. 모두 중국꽃사과나무 류를 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5세기 당시에 중국에서 해당화로 부르던 중국꽃사과나무 류가 우리나라에 정원수로 심어졌을까? 고려 중기의 문신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금주衿州 객사에서 손孫 사인舍人이 써놓은 시에 차운하다 (衿州客舍次孫舍人留題詞韻)”에서 “금주의 좋은 봄 경치, 어찌 그리 기이한가! … 해당은 졸음 많아 곱게 드리웠는데 (衿州好春景一何奇 … 海棠眠重正欹垂)”라고 읊고 있다. 해당의 꽃이 봄에 곱게 피어 드리웠다고 했으므로, 이규보는 해당화가 아니라 중국꽃사과나무나 수사해당 같은 키 큰 나무에 핀 꽃을 감상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금주는 금천衿川이라고도 부르는 경기도의 옛 고을 이름으로 지금의 광명, 시흥 일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규보의 이 시를 통해 중국꽃사과나무 류의 해당이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박柳璞(1730~1787)의 <화암수록> ‘화개월령’에는 3월에 피는 꽃으로 살구꽃, 복사꽃 등과 함께 ‘해당海棠’을 들고 있다.**** 화개월령에서 중국명 매괴玫瑰, 즉 R. rugosa로 추정할 수 있는 이름은 찾지 못했지만 월계화와 장미가 4월에 핀다고 기록했으니, 해당이 장미보다 먼저 피고 있는 점을 살필 수 있다. 그러므로 <화암수록>의 해당은 해당화(R. rugosa)가 아니라 중국꽃사과나무 류일 가능성이 더 크다. 화암수록의 '해당'은 "속명으로 산단山丹이라 하는 금사단엽홍은 향기가 없고 꽃 또한 매화와 가까우나 샐깔은 곱고 어여쁘다. ... 산단은 아마도 '해당'일 것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산당화로도 부르는 명자꽃(Chaenomeles speciosa)일 가능성도 있다.++ 또한 <광재물보>에도 해당에 대해 ‘해당화’라고 한글 표기를 한 후, “모양은 모과나무 비슷한데 작다. 2월에 붉은색 꽃이 핀다. 8월에 열매가 익는데 크기는 앵두 정도이다.”라고 했으므로, <광재물보> 저자도 해당을 중국꽃사과나무 류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비해당48영 뿐 아니라 조선시대 문헌에서 ‘해당海棠’을 만나면 이것이 현재의 해당화인지 중국꽃사과나무 류인지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읊은 ‘깊이 잠든 해당 (熟睡海棠)’ 전체를 읽어본다.
豈以無香小此花 향기 없다고 이 꽃을 어찌 얕보랴
世間紅白謾紛拏 세상의 홍백색 꽃은 부질없이 다투네
粉粧照曜非何晏 환한 분단장은 호색한 위함 아니고
錦帳離披是石家 비단 장막 흩날리니 만석꾼 집이로다
臨水醉容開鏡艶 물 가에서 취한 얼굴 거울 속에 농염하고
倚闌睡態受風嘉 난간 기대 잠든 모습 바람결에 아름답네
恰如美女在空谷 흡사 미녀가 빈 골짜기에서
素面還將翠袖遮 흰 얼굴이 도리어 푸른 소매에 가리는 듯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해당에 향기가 없다고 한 것은 중국꽃사과나무 류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3구의 하안何晏은 위魏 무제의 부마로 호색한好色漢이었다고 하며, 4구의 석가石家는 만석꾼 집안을 뜻한다. 5구의 “취한 얼굴”과 6구의 “잠든 모습”은 양귀비의 침향정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채수는 장미속의 해당화가 아니라 사과나무속의 해당을 떠올리면서 시를 지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48영에 화답시를 지은 15세기 문인들도 대개 양귀비를 상징하는 해당이 중국꽃사과나무 류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수사해당(M. hallians)은 두어 차례 상봉할 기회가 있었지만, M. spectabilis라는 학명을 가진 중국꽃사과나무, 즉 비해당48영의 해당은 아직 감상하지 못했다. 올해 봄 북경 출장에서 감상한 꽃사과나무가 M. spectabilis였을까?
<끝>
*비해당48영의 제목은, 1 梅窓素月, 2 竹逕淸風, 3 日本躑躅, 4 海南琅玕, 5 翻階芍藥, 6 滿架薔薇, 7 雪中冬白, 8 春後牡丹, 9 屋角梨花, 10 墻頭紅杏, 11 熟睡海棠, 12 半開山茶, 13 爛熳紫薇, 14 輕盈玉梅, 15 忘憂萱草, 16 向日葵花, 17 門前楊柳, 18 窓外芭蕉, 19 籠煙翠檜, 20 映日丹楓, 21 凌霜菊, 22 傲雪蘭, 23 萬年松, 24 四季花, 25 百日紅, 26 三色桃, 27 金錢花, 28 玉簪花, 29 拒霜花, 30 映山紅, 31 梧桐葉, 32 梔子花, 33 苔封怪石, 34 藤蔓老松, 35 矜秋紅柹, 36 浥露黃橙, 37 蜀葡萄, 38 安石榴, 39, 盆池菡蓞, 40 假山煙嵐, 41 琉璃石, 42 硨磲盆, 43 鶴唳庭松, 44 麝眠園草, 45 水上錦鷄, 46 籠中華鴿, 47 木覓晴雲, 48 仁王暮鍾 이다.
**Malus halliana의 중국명은 수사해당垂絲海棠이다. 그리고 Malus x micromalus의 중국명은 서부해당西部海棠이다. 그런데 국립수목원의 <국가표준 재배식물 목록>에는 Malus halliana의 한글추천명으로 ‘서부해당’을 적고 있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M. halliana의 한글명으로 수사해당을 쓰기로 한다
***권경인,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이유출판, 2023, pp.256~263. - ‘명사십리 해당화와 양귀비를 비유하는 해당’ 중 p.261
***유박 지음, 정민 김영은 손균익 외 옮김, 화암수록 – 꽃에 미친 선비, 조선의 화훼백과를 쓰다, Humanist, 2019.
****海棠 ‘해당화’ 狀如木瓜而小二月開紅花八月實熟大如櫻桃 -광재물보
+표지사진 - 꽃사과나무 류, 2022. 5. 1 안동 녹전
++ 페친 이문규 선생께서 화암수록의 '해당'은 명자꽃/산당화 (Chaenomeles speciosa)일 가능성을 말씀하셨다. 아마도 안사형의 발언 "속명으로 산단山丹이라 하는 금사단엽홍은 향기가 없고 꽃 또한 매화와 가까우나 샐깔은 곱고 어여쁘다. ... 산단은 아마도 해당일 것이다."(유박, 화암수록, 정민 등 옮김, p.53)라는 기록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도 있다. (유박이 안사형의 의견에 동의했는지는 조금은 미지수이다.) '해당'이 등장하는 문맥에 이 꽃나무가 관목인지 소교목인지 잘 판단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