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출판 근간, 최광빈의 <푸른도시, 서울의 공원> 독서 기념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내 마음 한 켠에 자리잡는다. 책에서 소개된 곳들이 가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최근에 이유출판에서 펴낸 <푸른도시, 서울의 공원>도 그런 책이었다.* 40여년 긴 세월동안 소신과 열정으로 서울의 공원 건설에 참여한 최광빈님이 쓴 책이다. 평소에도 공원을 걸으며 나무며 풀, 꽃 구경을 좋아했지만, 이 책을 읽고 각각의 공원들이 건설되는 배경을 조금씩 알게 되니 서울의 공원들이 더 친근감있게 다가왔다. 책에서 소개된 곳들을 직접 걸어보고 싶어졌다. 뜻을 가진 공직자 한 사람의 행정 역량이 시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책에 소개된 공원들 중 내가 가본 공원들을 꼽아본다. 남산공원, 세종로공원, 양재시민의숲, 양재천, 여의도공원, 난지도 하늘공원, 서울숲, … 공원을 목적지로 삼아 가본 곳이 아니라, 서울 나들이길에 시간이 남아 들러 본 곳들이 대부분이다. 최광빈 님이 소개한 공원 중에 가보지 못한 곳이 상당히 많다. 언젠가 다 가보고 싶다. 그 중에서도 세계적인 설계 명장들이 참여하여 건설했다는 선유도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정수장으로 쓰이던 곳을 공원으로 재생한 곳인데, 정수장의 침전지를 수생식물원으로 재생시켰다는 것도 특별히 내 관심을 끌었다.
몇 달 전, 한시 번역에서 ‘백빈白蘋’을 ‘흰 마름’으로 해석하는 데 대한 글을 써서 안동지에 기고한 적이 있다.** 마름쇠를 ‘능철菱鐵’이라고 했듯이 마름은 옛글에서 주로 ‘능菱’으로 표기한다. 그런데 네가래를 뜻하는 빈蘋을 왜 ‘마름’이라고 했을까에 대한 배경을 추적한 글이다. 며칠 전에 또 백빈을 ‘흰 마름’으로 번역한 글을 읽고, 혹시 빈蘋은 네가래를 뜻하지만 백빈白蘋은 다른 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시 검색해보니, 바이두(百度百科)에 백빈白蘋의 중국 명칭은 수별水鼈이지만, 개구리밥(부평浮萍)이나 네가래(사엽빈四叶蘋, 전자초田字草)를 뜻하기도 하여 서로 혼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수별水鼈의 우리 식물명은 자라풀(Hydrocharis dubia)이다. 자라풀 꽃은 8~10월에 백색으로 핀다고 하므로, 우리 옛글에서 가을에 흰 꽃이 피는 것으로 표현되는 백빈白蘋은 자라풀을 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시상을 일으키기에는 네가래 보다는 자라풀이 더 어울릴 듯하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선유도공원에 수생식물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순수하게 선유도공원만을 목적지로 하여 한나절 나들이했다. 혹시나 수생식물원에 백빈白蘋으로도 불리었을 자라풀 꽃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선유교를 지나 공원에 들어서니 건축물과 산책로, 식물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역시나 명장의 손길이 닿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요 목적지인 수생식물원은 가까이 있었다. 기둥을 타고 자라는 담쟁이덩굴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여 아름다웠다. “기존 침전지를 활용한 수질정화원과 정수지의 낡은 콘크리트 기둥에 담쟁이를 심어 녹색기둥을 만든 것도, 선유도를 옛 정수장의 ‘역사적 켜’를 간직한 서울의 대료 재생공원으로 만들겠다는 두 분의 의기투합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쓰여진 문장의 현장을 확인했다.
수생식물원엔 물양귀비 꽃과 털부처꽃이 피었고, 각종 수련들도 활짝 피었다. 개연꽃과 왜개연꽃도 보이고, 어리연꽃은 이미 진 듯했다. 자라풀이 어디 있을까 기웃거렸지만, 흰 꽃이 핀 수생식물은 찾지 못했다. 아마추어 식물애호가가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자라풀을 꽃이 없는 상태에서 동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쉬움을 남기고 수생식물원을 떠났다. 공원 이곳 저곳을 걷다가 기대치 않게 화훼로 예쁘게 꾸며진 자그마한 길가에서 ‘안래홍雁來紅’을 만났다. 그림으로도 보았고, 도감으로도 여러 번 눈에 익혔던 터라, 처음 만났지만 잎사귀 색깔을 보고 금방 알아차렸다. 1m가 채 안되는 키에 줄기는 곧추섰다. 아래쪽 잎은 푸르고 위쪽 잎은 노랗게 붉게 원색으로 물들었다.
‘노소년老少年’이라고도 하는 안래홍은 기러기가 날아오는 늦가을까지 붉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색비름이라고 하며, 열대아시아 원산의 비름속 식물로 학명은 Amaranthus tricolor이다. 조선후기 문인들이 읊은 시에도 꽤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명연申命衍(1808~1886)의 산수화훼도에 안래홍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보인다. 붉은 색으로 안래홍을 표현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에 열린 제2회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도 안래홍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면 안래홍은 화훼로 가꾸어지면서 품종이 다양해진 듯하다. 늦가을까지 붉은, 늙어도 젊음을 간직한다는 의미 때문에 안래홍은 문인, 화가들이 아꼈던 화훼였던 듯하다. 마지막으로 안래홍이 나오는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계묘년(1783) 가을, 당직 중에 꽃 그림을 잘 그린 김덕형金德亨에게 부채에 4가지 꽃을 그리도록 하고 여백에 쓴 제화시題畫詩이다.
옥잠화와 찔레 열매, 안래홍과
산국은 쓸쓸하여 뜻이 다르네
가을 정원의 섬세한 풍경을
부채에 그려 가을바람 맞이하네
玉簪營實雁來紅(옥잠영실안래홍)
山菊蕭蕭意不同(산국소소의부동)
一段秋園纖巧景(일단추원섬교경)
寫來團扇媚西風(사래단선미서풍)
이렇게 선유도 공원은 첫번째 방문 기념 선물로 색비름 안래홍을 만나는 행운을 안겼다. <푸른도시, 서울의 공원>이라는 좋은 책을 쓴 저자와 이유출판에 고마운 마음이다. 선유도공원 수생식물원에 자라풀이 있다는 블로그 글도 있고, 10월 까지는 꽃이 핀다고 하니 올 가을에 다시한번 선유도공원 나들이를 해야겠다. (끝)
* 푸른도시, 서울의 공원 – 소신과 열정의 공원만들기 40년, 최광빈, 이유출판, 2025.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279293)
**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5년 5/6월호, ‘석전石田을 추억하는 설죽雪竹의 시 한편과 백빈白蘋 - 마름과 네가래’ (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123)
*** 우리나라에서 자라풀은 남부지방 및 중부 서해안의 섬 지역에 자생한다고 한다. 현재에는 연못에 관상용으로 심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육지의 큰 강가에 자랐을 가능성은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에 등장하는 白蘋은 자라풀이나 마름, 네가래 등 실제 식물을 보고 쓴 글이 아니라, 은자가 사는 곳을 상징하는 백빈주白蘋洲의 관용적 표현일 가능성이 더 크다.
*** 앞의 책, p.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