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를 읽고
사라진 날씨요정의 기운, 먼저 파리에 다녀간 친구들의 조언이 키운 불안과 경계심, 기어코 내 앞에 나타난 소매치기로 점철된 나의 파리여행은 영 좋지 못한 결말을 향해가고 있었다. 떠나기 전, 이 낭만의 도시를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불타 부지런히 루브르와 오르세, 오랑주리를 누비고,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 반짝이는 에펠탑 앞을 서성였지만 이곳에 대한 애정은 솟아나지 않았다.
더 욕심부리지 말고 조용하고 소탈히 파리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로 다짐하며 숙소를 나섰다. 한편에 피어오르는 기대를 누르며 영화 ‘비포 선셋’ 속 서점인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향했다. 소탈히 보내자는 결심이 무색하게 조그만 서점에서 뭐라도 놓칠까 구석구석을 살폈다. 위로 쪼르르 난 빨간 나무계단을 오르자 헤밍웨이가 자주 머물렀다던 작은 소파와 책상이 보였다. 그의 명성에 비하면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밖이 내다보이는 창이 난 그곳의 운치는 넉넉했다. 구석에는 피아노가 있길래 건반 몇 개를 눌러보다 어딘가에 기억되어 있던 모짜르트 소나타를 쳐 보았다. 눌리지 않는 건반이 많아 그만두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비포선셋의 대본집을 찾았다. 한국에서도 살 수 있고, 심지어 한국에서 파는 가격이 더 저렴했지만 계산대 앞에 줄을 섰다. 이곳의 스탬프도 받을 수 있고 영화 속 장소에 왔으니 이 정도 돈은 쓸만하다고 합리화했다. 계산대 옆에서 날 유혹하는 예쁘지만 튼튼하지 않은 에코백도 함께 샀다. 이 소비로 그 순간의 나는 무척 행복했고 스위스로 가는 긴 기차여행의 소중한 동반자를 얻었으니 그 값을 충분히 했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사르트르가 자주 찾았다던 카페 레 뒤 마고로 향했다. 해가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비로소 파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루브르를 가득 채운 유물도, 오랑주리의 커다란 수련도, 반짝이는 에펠탑도 채우지 못한 마음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속 장소를 가는 것으로, 좋아하는 철학자의 단골 카페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로 채워졌다. 내가 찾아 헤매던 낭만의 파리는 이곳에 있었다.
사랑이 시작될 때도 무언가 대단한 처음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별 것 아닌 것이 나에게는 의미가 되어 사랑이 시작된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애정을 쏟게 하는 것은 꽤나 자주 사소한 것이다. 사랑의 이유는 화려하고 대단하며 보편적이라기보다 사소하며 지극히 개인적이다.
한 영화평론가가 ‘500일의 썸머’를 보고 ‘사랑은 꼭 그 사람일 필요가 없는 우연을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운명으로 바꾸는 것’이라 코멘트를 남긴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에 아주 동의한다. 누군가는 이 말을 ‘아 결국 운명이 아니라는 거구나’라고 해석하겠지만 나는 그보다는 ‘우연을 운명으로 만든 선택’에 방점을 찍고 싶다. 운명인지 아닌지보다는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내겐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선택에는 책임과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 불꽃 튀는 시작을 다루는 이야기보다는 사랑을 결심한 대가로 마주하는 놀라울 만큼 다른 서로의 모습 속에 피어나는 운명이 아니라는 의심, 변해가는 사랑의 단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조용히 오가는 편지에서 싹튼 향안과 수화의 이야기에 자연히 마음이 간다. 그들이 나눈 편지 속에서 발견한 사랑스러운 서로와 그 사랑의 이유는 나는 알 수 없는 둘 만의 것일 테지만, 두 사람이 우연을 운명으로 바꾼 대가를 기꺼이 치름으로써 세월 속에 낡아지지 않고 서로의 소울메이트가 된 비결이 무엇인지 자꾸 책을 뒤적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