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어떻게 탄생했나
도널드 케이건은 이 책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체가 아니라 “그 전쟁을 서술하고 해석하는 역사가 투퀴디데스”를 탐구 대상으로 놓고 있다.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 제2장 ‘사회와 개인’에서 역사가의 역사 서술에는 그 연구자의 관점이나 입장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 입장 자체는 사회적·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다는 공리(公理)를 제시하였다(곽복희 옮김, 청년사). 결과적으로 도널드 케이건이 수행하고자 하는 작업은 투퀴디데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카가 제시한 공리의 예외가 아니라 한 사례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민주정을 혐오했고, 페리클레스의 정적이자 그의 사후 장군으로 임명된 클레온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또한, 투퀴디데스는 암피폴리스를 스파르타에 함락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20년 동안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이 추방 덕분에 그는 저술에 몰두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 무엇보다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사건을 다룬 것이었고, 전쟁에서의 “자기 조국의 위대함과 몰락”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그는 “현실에서 유리된 정신”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속한 존재로서 그 속에서 쌓은 경험에 영향을 받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투퀴디데스가 전하는 모든 정보를 사실과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그가 덧입힌 해석을 구분”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된다는 것이 케이건의 생각이다.
도널드 케이건은 투퀴디데스를 수정주의자라 규정한다. 이때 수정주의자란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투퀴디데스는 전쟁의 여러 국면을 바라보는 당대의 시선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반박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로 독자들을 바꾸기 위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케이건은 1~9장을 통해 투퀴디데스가 수정하고자 했던 당대의 시각은 무엇인지 살펴보며, 더 나아가 투퀴디데스보다 당대의 시각이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러나 도널드 케이건 자신도 결코 그 자신이 살던 시대와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이 책은 옮긴이의 말도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다), 도널드 케이건은 “젊은 시절 민주당 지지자였으나 1969년 학생운동을 보고 우파로 전향했고, 이후 보수주의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케이건은 네오콘의 핵심으로 미국의 대외 정책에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했다.”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연구에는, 현대 미국의 대외 정책과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듯한 해석도 존재한다. 특히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에 대해 개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는 케이건의 해석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염두에 두었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겠다.
책을 읽다 보면, 완전히 상반된 두 역사가의 주장에 독자들은 ‘어떤 주장이 옳은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를 질문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논의를 하는 데 유익할 듯하다. 투퀴디데스와 케이건이 드는 근거, 둘의 관점, 배경, 위치, 상황 맥락 등을 고려하며 ‘이건 아닌데?’ 싶은 부분은 과감하게 의문을 제기해보고 텍스트에서 그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 공부란 단순한 정보 전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사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 우선 엄밀한 텍스트 독해가 먼저 수반되어야 함은 당연하겠다. 도널드 케이건의 연구가 그 자신의 뚜렷한 정치색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수준과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섣부른 정치적 적용 대신에 “진실 자체에 대한 성실한 탐구”가 선행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