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 『조선의 힘』, 역사비평사, 2010
조선 시대에 관심이 많든, 조선에 대해 피상적인 이미지와 정보만 가지고 있든, 공통적인 것은 조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를 놓고,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생각보다 많다. 이런 평가가 성립하려면, 우선 근대화의 정의부터 내려야 하고, 왜 근대화를 했어야 하는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근대(modern)라는 말에는 대체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modern)로, 17~19세기를 가리킨다. 두 번째는 사유의 틀로서의 근대(modern)로, 이는 다시 1) 정치적으로는 통일국민국가, 2) 경제적으로는 자본제적 생산양식, 3) 사회문화적으로는 개인주의가 있다. 시기로서의 근대는 끝났지만, 사유의 틀로서의 근대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역사를 바라볼 때도 우리는 국민국가, 자본주의, 개인주의라는 틀로 평가할 가능성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그러하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이 역사를 보는 관점으로서 타당하냐는 것이다. “근대는 보편적이지 않은 목표를 보편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에는 당연히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폭력성이 포함된다. 이 폭력성을 내면화하면서 사람들은 성립할 수 없는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근대를 지나치게 악마화할 이유도 없지만(폭력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기 때문에), 근대적 가치만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 조선에 일방적으로 근대화를 요구하는 것은 폭력일 수 있다. 또한 근대주의는 식민주의와 맞물려 더욱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오항녕의 『조선의 힘』은 조선 시대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인식을 교정하는 것이지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그 잘못된 지식과 인식 배후에 놓여 있는 근대주의적 시각과 그로부터 파생된 왜곡과 오해를 지적한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아마 근대주의적 시점으로 가장 많이 재단당했을 것이다. 조선의 발전을 저해했다든지, 조선은 성리학 한 가지 사상만 인정했다든지,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 같은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식민주의 콤플렉스”의 영향일 수 있으며, 조선 시대에서 성리학이 가진 역사성과 맥락을 간과한 관점이다. 성리학은 불교적 인간관과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불교를 비판하면서 시작한 성리학은 고려 말 신진사대부, 조선 초 사대부들에게는 “당시 사회의 폐단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고려 말은 불교계에 의한 사회 문제가 극심했던 시기였는데, 이를 바로잡는 데 “새로운 지식인층의 사상, 성리학이 가장 유력한 방법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양명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조선 사회의 폐쇄성보다는 양명학이 나왔던 명나라의 사회와 같은 시기 조선 사회가 달랐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성리학이 형식화되었던 때, “주체성의 자각과 강력한 실천”을 촉구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사화라는 정치적 위기와 “사찰 경제의 비대화”로 인한 현실적 폐단이라는 이중적 위기를 맞았던 사림들에게는 인상적인 메시지가 아니었다. 이는 퇴계가 한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우리는 조선 사회를 모른다,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명학처럼)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좋지만 그전에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편견과는 달리, 송시열이 윤휴 등 정적을 이단/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사형에 처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은 보편주의적 입장에서 성리학을 이해했고, 이는 퇴계와 율곡과 유사했다. 그는 보편적 원칙을 따라 과도한 특권을 누리던 왕실의 금고 같은 “내수사 혁파”를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양반도 호포(군대를 가는 대신 내는 포)를 내야 한다는 “양반호포론”과 노비를 줄이고 평민을 늘여나가는 정책을 주장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의 사상적 기반에는 성리학이 있었다. 성리학이 과연 얼마나 조선 사회를 경직시켰는지, 재고해봐야 한다.
근대주의적 관점에 의하여 상당히 왜곡된 또 다른 역사 인식은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 중립외교와 실리적 외교를 했다는 평가이다. 광해군 대 정치는 자신의 위협요소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어 결국 고립을 초래하였고, 최소 “전체 국가 예산의 15~25%”를 투입하여 궁궐 공사를 진행해 경제적으로도 폐해가 나타났다. 또한, 치적으로 평가받는 외교는 어땠을까? 오항녕은 원칙도 없던 기회주의 외교였다고 비판한다. 광해군이 실리는 챙겼다고 할 수 있지만, 외교에서 명분과 실리는 “같이 가는 것이다. 명분 없는 실리는 오래가지 못하고, 실리 없는 명분은 공허한 것이다. 곧 원칙 없는 정책, 비전 없는 정책이 오래 갈 수는 없는 것이다.
” (광해군에 대한 더 자세한 평가는 동저자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참조)
그러면 왜 광해군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일까? 광해군 재평가는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라는 일본 식민사학자의 영향이 컸다. 이나바는 “광해군의 ‘실리주의’ 외교와 반정 세력의 ‘명분론’을 대립시키면서, 이 명분론을 명에 대한 사대주의로 규정했다.” 즉, 조선은 명분만을 중시하여 실리를 버렸고, 그 결과 망했다는, 조선의 멸망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교묘한 논리가 광해군 재평가의 배후에 숨어있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대 외교는 그다지 실리를 챙긴 것도 아니었으며, 대후금 정책에서는 강홍립의 항복으로 조선 군사 1만여 명 중 9천여 명이 전사하였다. 현재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보는 주장이 이니바처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은 없지만, 조선은 실리를 저버려 망했다는 인식은 공유하고 있다. 식민지의 경험 속에서 이 인식은 더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광해군은 근대주의와 식민주의의 메커니즘에 의해서 재평가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조선 시대사 책을 읽기 전에, 조선 시대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시각에서 보면 안 되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입문서이다. 또한 각 챕터에서 다룬 주제들은 저자의 다른 책들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저자의 다른 책을 읽기 전에 먼제 읽어볼 책이기도 하다. 물론 쉽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덮어놓고 쉽고 재밌는 것만 추구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한다면, “어려운 것은 어렵게, 쉬운 것은 쉽게” 설명하자는 저자의 태도는 수용할만하다.
참조: 같이 읽어볼 오항녕 선생의 다른 저작들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오항녕, <실록이란 무엇인가>, 역사비평사
오항녕, <후대가 판단케 하라>, 역사비평사
오항녕,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너머북스
이이, 오항녕 옮김, <율곡의 경연일기>, 너머북스
여담: 몇 가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3장 헌법과 강상(綱常)에서 오항녕은 “유가 경전 내부에서 보아도, ‘경=텍스트’의 변화는 그 경에 대한 ‘해석’의 변화를 수반했다...또한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경과 그 해석의 변화가 단지 유가 문화권의 현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서양철학에서는 유교 경전과 같은 경이 없었고(중세 신학과 성경은 논외로 하자), 플라톤의 위상도 공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고 했을 때는, 플라톤의 철학과 저작이 후대 철학의 일반 개념들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이다. 이렇게만 서술하면, 플라톤과 그의 대화편이 경전처럼 취급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동양철학에 빗대어 서양철학을 설명하려다 발생한 부주의 같다. 헌법과 계몽주의의 관계를 정치규범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념(=경)으로 설명한 것도 타당한지 의문이 들었다. 이는 그저 내 공부가 부족하여 생긴 의문이니, 이후 내가 공부하면서 풀면 된다.
6장에서도 이나바 이와키치 이후의 광해군 재해석 경향을 비판하면서, 조선 당대인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다는 근거로 인조의 교서를 드는데, 이익, 홍대용, 정약용의 평가는 둘째치고. 어쨌든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 정부가 광해군에 내린 평가가 왜곡되지 않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 부분은 저자가 다소 성급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현대 한국의 정치와 연관지어서 설명하는 부분도 논리가 너무 거칠어 더 섬세한 비교와 논리가 필요하다는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