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man Mar 03. 2021

모든 배움은 상기다

플라톤, 이상인 옮김, 『메논』, 아카넷, 2019


플라톤의 <메논>은 자신이 무지함을 먼저 깨달을 때 모든 지적인 탐구가 개시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크라테스 문답법을 통해 배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룬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상기론으로, 상기론은 추론을 통한 “합리적 배움과 탐구의 방법”이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합리적 검증과 비판적 검토의 기술”이라고 볼 때, 상기론은 이러한 문답법의 정신을 다른 측면에서 재현한 것이다.



역자의 해설을 참조하면, 소크라테스의 합리적 탐구를 위한 방법으로서의 문답법은 4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탐구하는 주제의 “사례나 현상이 아니라” 그 주제의 “본질”을 탐구한다. 둘째, 항상 대화 참가자가 미리 동의한 것들만을 이용하여 탐구를 수행한다. 셋째, 대화가 상대주의에 빠지게 하지 않기 위해 “논리적 공리서 모순율을 전제”하고, 따라서 넷째 대화 상대방의 진술이 미리 동의한 것들과 모순되지 않는지를 늘 따진다. 플라톤의 거의 모든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와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주장에 모순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대화 상대자가 가지고 있던 그릇된 확신을 무너뜨려, 스스로 안다고 확신했던 그들이 사실은 전적으로 무지했음을 깨우쳐 진정한 의미에서 지혜를 향한 탐구의 길을 여는 산파의 역할에 충실히 임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이르게 되면,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한다. 본 대화편의 주인공인 메논도 마찬가지로, 탁월함에 대한 자신의 정의가 번번이 논박당하자 메논은 소크라테스를 인간의 영혼과 입을 마비시키는 “전기가오리”에 비유하며, 전적인 무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당신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탐구하실 겁니까, 소크라테스? 당신께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전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말이죠.”라고 묻는다. 이것을 ‘메논의 난제’라고 부른다.



메논의 난제에는, 인간은 자신이 전적으로 모르는 것은 탐구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만약 이것이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라면, 메논의 난제는 옳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탐구는 “전적으로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는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영혼 불멸’과 ‘전쟁의 배움’이라는 신화적 비유로써 표현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합리적 탐구를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상기는 이러한 “전생의 배움”으로부터 시작된다. 미리 아는 것, 혹은 미리 동의된 전제들로부터 추론을 걸쳐 합리적 결론에 다다르는 인간의 탐구 과정이야말로 상기이며, 배움의 과정이다. ‘전생의 배움’은 배움의 ‘조건’이며, ‘이생의 배움’은 배움의 ‘결과’이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의 노예 소년을 불러 이를 증명한다. 노예 소년의 탐구 주제는 ‘면적이 8제곱피트인 정사각형 한 변의 길이는 얼마일까?’이다. 이 소년은 수학이나 기하학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러나 소년은 소크라테스와 동의한 몇 가지 전제와 추가적인 질문만을 통하여 스스로 전제들을 상기하고 추론함으로써 정답에 이른다. 물론 처음에는 질문의 답이 4나 3이라고 잘못 확신하여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받아 난관에 빠졌지만,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산파 소크라테스의 도움을 받아 ‘용감하게’ 탐구를 거듭하여 결국에 답을 찾는다(정답이 자연수가 아니라서 소년은 그 정확한 답을 알지 못했지만, 어떤 기하학적 원리로 답을 찾을 수 있는지는 ‘발견’했다).



이러한 상기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노예 소년의 예에서 보듯이, 상기는 선행하는 인식으로부터 추론을 통해 모든 가르침과 배움에 이르는 합리주의적 탐구 방법이다. 문답의 과정은 미리 동의된 것들로부터, 모순율에 위배되지 않게 주제를 탐구하는 합리적 탐구 절차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문답을 통해 대화 상대방은 자신이 독단적인 확신(doxa)에 빠져있었음을 알게 된다. 곧 그의 문답은 상대방의 ‘전적인 무지’를 깨우치게 해주는 수단이다. 이때의 ‘전적인 무지’는 자신이 어떤 것을 ‘지금’ 모르고 있다는 것과 나의 무지함을 자각케 하는 어떤 것을 ‘지금’ 알고 있는 ‘무지의 지(知)’이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이는 앎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이 무지는 그를 더 높은 탐구와 지(知)로 인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기는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지를 알고 있는 선행적인 인식들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 탐구가 난관에 빠졌을 때, 그래서 더욱더 알기를 갈구하게 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로소 탐구와 배움이 시작된다. 자시의 무지에 대해 “용감하고 탐구하는 데 지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런 면에서 배움이란 기존의 아는 것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며, 교육이란 메논 같은 소피스트들이 아니라 ‘용감한 소년’을 기르는 일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일본의 유학화와 근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