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소의 외침
제주에서의 피난 생활은 참 어려웠습니다. 단칸방에서 아끼고 아끼며 버텨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과 함께할 수 있었기에 이중섭에게는 행복한 날들이었는데요. 서귀포의 환상이란 작품 제목에서부터 그가 꿈꿨던 이상적인 모습이 느껴집니다. 서귀포 바다를 앞에 두고 제주 감귤농장이 보이죠. 농장에서 아이들은 배구공만큼 큼직한 감귤을 손에 쥐고 뛰어놀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갈매기를 타고 날아오르는 모습이죠. 이렇듯 서귀포는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하며 행복에 젖은 달콤한 꿈을 꾼 환상과 같았습니다.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아 음식도 나누고 쪼개어 먹는 열악한 현실이었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이상향의 꿈을 꿀 수 있지 않았을까요? 평화를 상징하는 3마리의 흰 새가 우리를 꿈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중섭은 현실적으로 그림을 그리기조차 어려운 날들이 많았습니다. 귀중품이며 그림을 그릴 도구나 재료는 모두 원산에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큰 어려움이 따랐죠. 〈서귀포의 환상(1951)〉 역시 캔버스가 아닌 나무판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한국전쟁 중 캔버스를 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다양한 재료를 주워와 그림을 그렸죠. 유화물감도 귀한 재료였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사용하는데요. 그래서 아주 얇게 채색해 나무판이 살짝 비쳐보이는 작품입니다. 이렇듯 서귀포는 현실과 환상 모두를 보여준 곳이었죠.
1951년 1월, 가족들과 함께 내려온 제주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매서운 칼바람과 추위를 꿇고 서귀포까지 걸어가야 했죠. 오늘날엔 제주도에서 서귀포로 내려가기 위해 한라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1100도로를 통해 내려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제주 남북을 횡단할 수 있는 길도 없었고 한라산을 넘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다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오랜 시간 동안 걸어가는 방법을 택했죠. 〈가족과 첫눈 (1950년대 전반)〉에서는 제주에 도착해 쏟아지는 첫눈을 맞으며 함께 걸어갔던 가족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람만큼 거대한 새와 물고기와 함께 함박눈을 맞고 있는데요. 사람이고 동물이고 모두 신이 나서 눈 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이중섭의 꿈 속의 장면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이는데요. 아마 해안가를 따라 오랜 기간 걸어 내려가고 있던 가족들에게 당시 눈보라는 이렇게 아름답고 낭만적인 소식은 아니었을 겁니다. 무섭게 휘몰아치는 칼 같은 겨울 바람을 견뎌야 했던 겨울날이었는데요. 눈보라 속에서도 서로를 끌어안고 의지하며 헤쳐나갔을 그의 가족들의 따뜻함과 가족애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이렇듯 이 무렵부터 이중섭 작품 소재는 대부분 가족과 아이들이었습니다.
이중섭과 가족들이 서귀포에 머무른 시간은 1년도 안 되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주에서 많은 작품을 그렸고, 다시 뭍으로 올라온 이후에도 서귀포 시절을 추억하며 그린 작품들이 많았죠. 좁은 단칸방에서 당장 먹을 쌀도 없어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가족과 함께했던 제주에서의 날들이 이중섭에게는 낙원과 같았나 봅니다.
이들의 서귀포 시절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있는데요.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전반)〉 입니다. 작품의 제목처럼 두 아이가 손 끝의 줄을 이용해 게와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요. 두 아이는 이중섭의 아들 태헌와 태성군인 것 같습니다. 서귀포에서 피난민들에게 주는 배급 식량이나 주민들의 도움으로 받는 음식만으로는 아이들의 배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이들을 데리고 이중섭은 서귀포 앞바다로 향했죠. 바다에서 조개나 게 그리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배를 채웠습니다. 사실 대단한 실력의 낚시꾼은 아니었기에 많은 양을 잡아오진 못했는데요. 하지만 이때 바다에서 아이들과의 시간 자체가 행복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먹거리도 잡고, 아이들과 놀이하듯 시간도 보내고 아빠로서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죠.
하지만 계속된 피난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남덕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습니다. 두 아이들을 먹이려고 부부는 굶는 날이 많았는데요. 남덕은 각혈을 하고 결핵에 걸립니다. 결국 1952년 이남덕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먼저 건너가게 되었죠. 그렇게 이중섭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홀로 남았습니다. 이때부터 중섭은 마음을 담은 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내기 시작합니다. 작품 속에도 여전히 가족들이 주인공이었죠. 〈도원 (1954)〉은 일본으로 떠난 아이들과 남덕이 무릉도원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기를 바라는 중섭의 마음이 담긴 작품인데요. 그림에는 역시나 네 사람이 보입니다. 아래 두 사람은 어른의 모습, 그리고 나무에 오른 아이들의 모습인데요. 복숭아 나무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입니다. 복숭아는 신선의 과일로 알려져 있는데요. 탐스럽게 열린 복숭아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도원 (1954)〉은 이중섭이 간절히 바랐던 낙원이었나 봅니다.
‘그럼 몸 성히. 나의 소중한 아내여. 대향만을 믿고 사랑하고 편지 많이많이 보내면서 태현이, 태성이와 함께 기다려주시오.’
- 5월 2일 이중섭 대향 구촌 –
‘나는 지금 당신을 얼마나 격렬하게 사랑하고 있는가… 당신과 헤어진 이후 날이면 날마다 공허해서 견딜 수가 없소. 다음에 가면 남덕의 모든 것을 두 팔에 꽉 껴안고 내 곁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결코 놓지 않을 결심이오. 대향은 모든 정성을 다해서 남덕 군의 모든 것을 굳세게 사랑하고 있소.’
- ㄷ ㅐ ㅎ ㅑ ㅇ -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