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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다 Jan 11. 2021

엄마의 식탁

#00 엄마, 아버지 그리고 엄격한 식탁.

엄마.

문득, 서른이 되어서도 모친을 엄마라고 호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뮈의 이방인 첫 문장인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와 관련된 번역 논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방인의 초기 번역본에는 '엄마' 대신 '어머니'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 번역가 생각에는 소설 속 주인공인 뫼르소가 성인이 되어서 모친을 여전히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서에도 아기나 어린이가 모친을 부르는 표현인 '마망maman'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전 세계 유일한 유교국가에서 어림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작중 인물인 뫼르소의 정신적인 미성숙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어머니라고 번역했다. (사실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명백한 실수이다.)


 또한 유교국가에서 자라난 탓인지 호칭에 대한 고민이 진작 들었다.   성숙한 호칭을 통해 내가 독립된 개체이며 엄연한 성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모친을 한층  있게 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발음이 어려워서 형을 '엉아'라고 부르던 것도 '형아' 거쳐 ''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형은 어머니도, 엄마도 입에 담기 힘들었는지 주어 없이 대화를 했고, 둘째형은 일이 바빠지면서 가족 모임에 좀처럼 참여하지 않게 되는 일이 많았다.


아무튼, 그 해 추석에는 호칭 정리를 작정하고 일찌감치 부모님 집으로 내려갔다.

"어머니, 식사는 하셨어요?"라는 말에 엄마는 눈이 동그랗게 뜨고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셨다.

"얘, 징그럽다. 어머니는 무슨. 그냥 엄마라고 해!"

"응, 엄마."

그렇게 호칭 정리가 끝났다.


아버지.

아버지는 소설 속에 표현되는 전형적인 공무원 같았다. 도저히 부수거나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위엄을 내세웠다. 그 벽에 힘껏 부딪히면 내 어깨만 부서질 것 같은 공포의 대상이고, 올려다보면 드높을 정도로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엄격한 가부장적 환경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학교가 끝나면 해찰할 겨를도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벨을 누르면 우리 삼형제는 나란히 서서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라고 인사를 했다. 우리 가족은 늦은 7시 무렵에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다섯 명의 식구가 앉기에도 넉넉하다 못해 큰, 아주 커다란 원형 식탁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 원형 식탁은 당시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구입한 것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그 식탁이 너무 높아서 팔을 얹고 먹어야 했는데, 그럴 때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나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책장에 꽂혀있던 문학전집이 내 친구였고, 백과사전이 스승이었다.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영혼이여 불꽃이여'는 당시 유행하던 유령 이야기인 줄 알고 읽었다. 사춘기 시절 설레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어른들의 은밀한 테크닉을 엿볼 생각에 나름 흥분된 마음으로 펼쳐보았던 부끄러운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의 서재는 아늑했다. 책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방, 커다란 책상, 그 앞의 작은 소파, 낡은 진공관 라디오, 가죽 의자 냄새. 오래된 책 냄새.

 

아버지는 주말이면 서예를 하셨다. 생각해보니 먹을 갈 때의 그 냄새가 좋았다. 아버지가 먹을 갈 때면 나는 그 옆에 붙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하얀 화선지를 펼쳐 놓고, 붓으로 길을 찾지 않으셨다. 그저 오랫동안 화선지 앞에 붓을 들고 정지된 듯 계셨다. 갈아둔 먹이 내려앉을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백지 앞에 계셨다. 그 무렵에는 그 모습이 답답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퇴근 후 지쳐서 귀가한 후에 하얀 모니터 앞에 앉아 점멸하는 커서를 그저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은 아버지를 투영하고 있다. 만화영화를 봐야 하는데, 다큐멘터리를 보던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 나도 다큐를 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과 같다.


대학을 입학한 후부터는,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좋아하셨다. 어색한 탓이었는지, 여전히 '아버지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엄격한 식탁.

예의 커다란 원형 식탁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심리학적으로는 원형 테이블은 편안함을 주고, 모두 같은 권력을 가진 평등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원형에는 사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 도중 딴짓을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식사는 말 그대로 일처럼 느껴졌다. 어린 형제들은 밥을 먹을 때 잡담을 할 수 없었고, 가능한 것은 엄마와 아버지가 묻는 것에 대답하는 정도였다.

한 때는 읽는 것에 과하게 열중했는데, 가끔은 생활과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식탁에 앉아 책을 보면서 밥을 먹다가 경을 치는 일도 몇 번 있었다. 아버지, 엄마, 큰형과 작은형이 순서로 숟가락을 드는 것을 수년간 지켜봐야 했던 엄격한 식탁에서 대화나 딴짓은 숱한 금기 중 일부였을 뿐이다.


당장 기억이 나는 것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밥과 국은 남기지 말 것. 그렇기 때문에 발우공양은 일상이었다.

- 좋아하는 반찬만 먹지 말 것. 싫어하는 것은 조금 드물게, 좋아하는 것은 많이, 자주 먹어도 혼났다.

- 소리 내서 밥을 먹지 말 것. 한 번은 '아구아구 맛있어!'라고 했다가 혼난 기억이 있다.

- 밥그릇을 들고 먹지 말 것.

-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식기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할 것. 숟가락이 밥그릇을 긁는 소리가 나는 것은 신성불가침과 같았다. 마지막 밥풀을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떼는 것은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 젓가락으로 밥을 먹지 말 것. 그렇다고 한들 반찬을 집으면 그날은 소화가 되기 전에 혼나는 날이었다.

- 반찬을 뒤적거리지 말 것. 낙장불입을 이때 배웠다. 집으면 먹어야 했다.

- 밥그릇에 숟가락을 꼽지 말 것.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밥그릇에 숟가락을 꼽고 합장을 했다가 혼이 났다.

- 멀리 있는 반찬을 지나치게 탐하지 말 것. 어렸던 나에게 커다란 식탁과 도무지 닿지 않는 햄과 고기는 절망이었다. 엄마가 얹어주던 고기 반찬은 사랑이었다.

- 밥을 먹는 동안 딴짓을 하지 말 것.


밥을 다 먹은 후에도 우리는 식탁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밥을 빨리 먹어도,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천천히 아주 느긋하게 물을 넘기는 모습을 오롯이 지켜봐야 했다. 아버지가 앉았던 식탁 의지가 뒤로 밀리면 우리들은 '잘 먹었습니다.'라고 외치고 (나이가 들 수록 점차 이 소리가 작아졌다) 각자 먹은 식기를 들고 싱크대 개수대에 담가두어야 저녁 식사 의식이 끝나는 것이었다.


엄마의 식탁.

엄격했던 식탁이 싫지 않았던 것은, 엄마의 반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식탁.

지금 생각해보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엄청난 스케일의 반찬들이었다. 매일같이 고기와 생선, 국이 올라가 있었고, 제철 식재료로 만든 다양한 반찬들이 커다란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메인 메뉴 하나와 김치나 피클만 곁들여서 먹는 요즘 내 식탁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생각해보니 어린 나는 엄마의 등을 보고 자랐다. 항상 가족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고 계셨다. 힘드셨을 건데 한번 싫은 내색하신 적이 없고, 아무리 아프셔도 식구들이 식사 준비를 거르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와의 사소한 다툼 후에도 식사 챙기는 것은 지키셨다.


느긋한 오후면 김 한 장 한 장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리는 일을 하셨다. 고등어와 갈치와 삼치, 임연수, 조기, 병어, 꽃게, 동태 등 제철 생선이 식탁에 있었다. 건장한 아버지와 삼형제를 위해 항상 고기를 굽고 삶고 튀기셨다. 어머니가 팥죽을 만들 때면 평소 얼굴을 보기 힘들던 사람들까지 찾아올 정도였고, 소풍을 갈 때면 담임이 김밥을 부탁할 정도로 소문이 나있었다. 잡채를 만들면 엄마의 친구분들이 더 좋아하실 정도로 손맛이 좋았다. 아버지는 항상 엄마가 만든 나박김치를 식사 때마다, 한그릇씩 드셨기 때문에 냉장고 한칸은 나박김치가 자리잡고 있었다.


아들 많은 집 막내아들은 딸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딸로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지만 말이다) 나는 엄마의 심부름을 도맡아서 했고, 배꼽이 싱크대 상판을 넘어가면서 설거지도 했다. 떡을 만들거나, 새알을 빚을 때, 칼국수를 뽑는 것을 비롯해 밀가루 반죽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물이 마를 일 없었던 엄마의 손이, 엄마가 조금 편했으면 했던 것 같다.


한국은 모계사회이다. 가부장이라고 하는 것은 불쌍한 남자를 '명예직'에 올려둔 것뿐이다. 사실상 엄마를 중심으로 가족이 뭉치고, 아이들이 자란다. 그리고 그 가족을 보듬기 위해 엄마들은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엄마도 처음 해보는 엄마인데, 많이 애쓰셨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헌신과 엄마의 희생으로 지킬 수 있었던 식탁.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모두 모여서 한 자리에 앉았던 마지막은 언제였는지 생각해본다.


그날, 그리고 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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