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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루캐리 Nov 03. 2022

전팀장 회고록

만병통치약

하루에 하나씩 365개의 질문이 담긴 다이어리북 '5년 후 나에게'를 쓰고 있다. 8월 19일의 질문은 '오늘 나를 가장 신경 쓰이게 한 것'이다. 이직 전인 작년 8월 19일, 나의 대답을 워딩 그대로 옮기면 '미친 부서장 미친 놈아 하 내가 탈출해야지'였다. 오늘의 브런치는 저 '미친 부서장', 전팀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 씨는 아니지만 그냥 전팀장이라 칭하겠다.


그럭저럭 평화롭게 굴러가던 나의 일상을 깨트린 것은 '팀장 공모제'였다. 같은 부서의 서비스 기획자였던 전팀장은 마케팅팀을 만들겠다며 지원했다. 홍보담당자인 나는 당연히 팀 구성안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몰랐고, 마케팅팀이 생기며 나의 악몽이 시작됐다.


이 글에 유익한 정보는 없을 것이다. 그저 2년 가까이 그를 상대하며 노이로제에 걸려 매일 녹음하고 녹취록을 쓰던 시간을 일부 발췌했을 뿐이다. 질릴 대로 질린 나의 부정적인 감정도 묻어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과거의 나에게는 살풀이가, 현재와 미래의 나에게는 위안이 될 것이다. 지금의 회사에서도 당연히 가끔은 힘들고 짜증이 난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전팀장을 떠올리면 신기할 정도로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 전팀장에 비하면 그냥 별것도 아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지 못했으나 나는 만병통치약을 구했다. 여전히 약발이 끝내주는 만병통치약, 전팀장을 돌아보며.



1년 차. 1월 16일.

세미나 참석자 대상 설문조사 문항을 작성해서 보고했다. 문항 중에는 '선호 선물'과 '내년에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전팀장은 선호 선물에 '페라리, 포르쉐, 람보르기니'를, 내년에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에 '남북통일, 세계평화, 우주정복'을 넣자고 회신했다. 전설의 시작.


1월의 어느 날.

팀 회의 시간. 대표님께 보고할 때 어떻게 하는지 내게 물었다. 시간이 되시는지 확인하고, 들어가서 용건을 보고드린 후 OK를 받고, 만약 받지 못하면 사유와 의중을 파악해서 개선 방향을 말씀드리고 나온다고 했다. 그러자 전팀장은 방에 노크할 때의 '똑똑'부터 자세히 알려달라고 했다.


5월 19일.

회의 시간. 전팀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 위에서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으니 컨펌 없이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고 반복했다. 이 팀이 생긴 지도 벌써 5개월이다.


6월 10일.

회사 사람들의 상상력이 부족해서 기획안만으로 설득할 수 없으니, 임원 컨펌 없이 사용 가능한 100만 원으로 지인에게 이미지 외주 작업을 주겠다고 한다. 기획안은 엉망이다. 그리고 우리 팀에는 일 잘 하는 두 명의 디자이너가 있다.


8월 3일.

타 부서와의 업무 분장도 알아서 하고, 서비스 컨셉도 혼자 알아서 정하라고 한다. 팀장 선에서 유관 부서와 먼저 협의해달라고 하니 이미 협의되어 있다고 한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처음 듣는다고.


8월 5일.

대표님과 회식을 했다. 전팀장은 대표님이 가이드를 안 줘서 힘들다고 했고, 대표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화답했다. 지친다.


8월 6일.

서비스 컨셉을 알아서 정하라고 하길래 '브랜딩 개선'을 목적으로 세일즈와 협의해보겠다고 했다. 그러자 전팀장은 홍보 카피만 수정하면 되는데 왜 그러냐고 되물으며, 서비스 컨셉을 정하는 이유는 '가입자 증대'를 위해서란다. 나는 '브랜딩 개선'이 더 큰 개념이며 브랜딩 개선 보고서를 쓰겠다고 했다. 전팀장은 '알겠다'면서도 끝까지 가입자 수치 변화를 보자고 했다.


9월 11일.

5일 전에 언론사 협찬 건을 보고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물어보니 뭘 검토해달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생각하느라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뭐긴 뭐야, 돈을 쓰냐 마냐지. 대표님께 보고해달라고 했더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보고서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한 장짜리 보고서를 만들었다. 스토리텔링이 부족하다고 한다. 하... 그냥 이번 협찬은 안 하겠다고 했다.


9월 18일.

서비스 컨셉에 대한 회의를 하다가 논쟁이 있었다. 전팀장은 서비스 컨셉을 설정하는 목표가 '가입자 증대'라고 '또' 주장했다. 도돌이표다. 8월 6일 회의 때 본인이 '알겠다'고 답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입자 증대'와 '브랜딩 개선'이 거의 같은 거라며 억지를 부렸다. 정 그러면 브랜딩 개선을 '서브 목적'으로 생각하란다. 납득할 수 없다고 하자 브랜딩 개선 보고서를 쓰되, 그 보고서의 목적은 '가입자 증대'라고 한다. 미치겠다.


9월 24일.

다른 부서 동료가 와서, 지금 서비스 설명회가 열리는데 전팀장은 어디 있냐고 묻는다. 그는 연차를 썼고, 설명회는 팀장에게만 전달되어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설명회에 들어갔다. 대표님은 마케팅이 중요하다며 내게 마케팅 계획을 물었다. 미치겠다.


11월 24일.

또 언쟁이 있었다. 코칭 때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언급하자 전팀장은 내게 예전 부서로 돌아가라고 했고, 난 보내라고 했다. 제발 보내줘. 제발 부탁이야.

일전에 '알겠다'고 해놓고 말을 바꾼 것을 언급하자 전팀장은 세 번 정도 말을 돌렸다. 그리고 네 번째 말했을 때야 자신이 말을 바꾼 것을 인정하며, 명심하겠으며, 고쳐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알겠다'고 말한 이유도 설명했다. 자신에게는 누군가와 논의하다가 진척되지 않을 경우 그 이야기를 중단하기 위해 '알겠다'는 말을 쓰는 면이 있다며, 나와 협의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사춘기 소년이 반항하는 심정으로 '알겠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사춘기 소년? 전팀장은 73년생이다. 정말 미치겠다.


12월 3일.

대표님 지시로 우리 팀에서 기술 블로그를 만들게 됐다. 전팀장은 팀장급 간담회를 주최해놓고 막상 그 시각이 되자 사라졌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팀장이 도망갔다며 수근댔다. 20분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간담회는 파투 났다.


12월 11일.

2주 전 파투 났던 기술 블로그 팀장급 간담회가 다시 열렸다. 간담회가 시작되기 전 우리 팀의 역할은 콘텐츠 작성이 아니라 윤문이라고 신신당부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전팀장은 타 부서에서 1~1.5p 분량의 원고를 써주면 우리 팀에서 4~5p로 늘리겠다는 결론을 들고 돌아왔다. 초안을 받아서 우리가 다듬고, 필요하면 늘리는 것이라고 한다. 1p짜리 글을 5p로 만들어도 그 글은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올라가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한다. 갈수록 태산이다.


12월 21일.

마케팅팀이 광고 말고 뭘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 팀이 생긴 지가 1년인데.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공부한 '얕은 사짜 지식'으로 많이 도와주겠다고 한다. 전팀장은 홍보 경력도 마케팅 경력도 없다. 화가 난다.


12월 24일.

업무 분장이 애매하던 인사 관련 업무를 인사팀에 넘기고 싶다고 전팀장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전팀장은 '그 업무를 그냥 안 하면 어떻게 되나요? 인사팀에서 하게 되는 건가요, 아니면 우리 이제 안 할 거니까 그쪽에서 하든가 하세요 라고 해야 되나요?'고 물었다. 하... 안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냐고 했더니 '그러면 말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나?'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러지 말고 인사팀과 얘기를 하라고 했더니 '우리 더 이상 안 할게요'라고 하고 오겠단다. 다시 한번 설명하자 '인사팀에서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죠? 얘기하면 잘 안하더라고.'라며 도돌이표. 결국 전팀장은 인사팀에 '안 해도 될지 검토 바랍니다'라고 메일을 보냈다. 미치겠다.


2년 차. 2월 3일.

갑자기 C 서비스와 M 서비스의 소개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작년에 새로 만들었다고 말하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2월 26일.

팀 회의 시간. 보고서 쓰라고 한 건 어떻게 됐냐며 나와 후배 D에게 화를 낸다.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런 얘기 한 적 없다고 말하자 펄펄 뛴다. 지난 주에도 말했고 메일도 보냈다고 한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도대체 메일을 언제 보냈냐고 같이 화를 냈다. 전팀장은 '안 보냈나?'라고 혼잣말을 한 후 3분 동안 메일함을 뒤지며 ‘희한하네'라고 말하고는, 이내 '임시보관함에 저장해놓고 보내질 않았네요'라며 웃었다. 수치를 모른다. 난 이러다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


3월 11일.

코칭 시간. 밀접접촉자 자가격리 때문에 영상통화로 대화했다.

1) 전팀장은 내가 자신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늘 기억을 못하고 말을 바꾸니 신경이 곤두선다고 답했다. 그러자 전팀장은 기억 못하는 것도 인정하고, 철두철미하지 못한 것도 인정하니 자꾸 본인에게 얘기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지난 1년 동안 얘기했지만 나아진 게 하나도 없으며, 좋은 얘기도 아닌데 계속 말하기도 힘들다고 대답했다. 노력하겠다길래 화이팅하시라고 했다.

2) 그리고 얼떨결에 팀장을 하게 돼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순간 화가 나서 얼떨결에 팀장이 된 게 아니라 (당신이) 직접 지원해서 이 팀이 생긴 거라고 (거의 발작하듯) 짚어줬다. 내게 자꾸 도와달라고 한다. 도대체 뭘 어떻게 더?

3) 본인이 휴가일 때 다른 팀원들과 커피 마시며 본인 욕을 하란다. 그래서 난 앞에서 말하겠다고 대답했다.

4) 마지막으로 후배 D는 어떤 것 같냐며 잘 챙겨달라고 했다. 후배와는 너무 잘 지내고 있으며 전팀장이 유일하고 거대한 문제이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3월 24일.

똑똑하고 사랑스러우며 누구보다 고통받던 후배 D가 퇴사하겠다고 한다. 그동안 전팀장은 나에게 별 말을 못 하는 대신 D를 쥐 잡듯 잡았다. 한 번은 D가 자신의 코칭 내용을 보여주었다. 전팀장은 자신의 실수, 잘못된 지시, 역량 및 인성 부족으로 인한 모든 일을 D의 잘못으로 몰며 악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공식적인 코칭 내용에 감정을 가득 실어, 수준 이하로. D가 조금이라도 잘 지낼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늘 미안했기에, D의 퇴사 그리고 이직이 무척 기뻤다.


3월 25일.

전팀장이 나를 불러 D가 왜 퇴사하는 것 같냐고 했다. 나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전팀장은 D가 업무 배울 곳이 없고, B2B라서 재미가 없어 그런 것 같다고 한다. D는 다른 B2B 회사로 이직한다. 이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경력으로 ASAP 충원해달라고 말했다.

며칠 후 인사팀 채용담당자를 마주쳤다. D의 퇴사에 따른 충원은 8월 공채 때 뽑아 9월에 입사하는 일정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홍보 마케팅 인력은 나와 D, 둘 뿐이고 난 9월까지 혼자 버틸 수 없다. 전팀장에게 메신저로 저 이야기를 하자 'ㅠ'라는 답장이 왔다. 어이가 없는 한편 조금 웃겼다. 이렇게 해탈하나 보다.


3월 30일.

전팀장이 자신의 피드백 방식에 대해 설명하며, 구글링했더니 이렇게 피드백하는 게 좋다고 나왔다고 한다. 이제 이 정도는 크게 놀랍지 않다. 그리고 본인이 힘들다고 한다. TMI...


4월 5일.

본인은 늘 혼나는 위치라고 하소연한다. 늘 혼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걸까?


5월 3일.

전팀장이 유료 결제 회원 세 명에 대한 인바운드 보고서를 작성해서 공유했다. 시사점은 '서비스를 일정 기간 무료로 이용하면 유료 회원이 될 확률이 높음'이라고 정리되어 있었다. 며칠 동안 야근한 걸 안다. 방향이 어긋난 정성이다.


5월 12일.

GA에 로그인할 때 인증코드가 필요해 전팀장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한참 월간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자꾸 오류가 난다. 저장이 되지 않는다고 몇 번 나오더니 꽤 많은 내용이 날아갔다. 뭔가 이상하다. 전팀장에게 물어보니 계정 비밀번호를 변경했단다. 내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걸 알면서 굳이 왜...? 결국 야근을 했고, 다음 날 전팀장은 미안하다며 커피를 사 왔다. 정말 도움이 안 된다.


5월 20일.

경계성 지능장애에 대해 검색해봤다.


6월 1일.

후배 D의 퇴사는 여전히 너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혼자 버티기는 역시 힘들다. 그래도 둘 다 힘든 것보단 혼자 힘든 게 낫지.


7월 2일.

3분기 광고비 품의 내용을 작성해서 전달해줄 테니 내가 올리라고 한다. 직접 올리시라고 하자 팀장이 올리면 팀장 결재가 안 되니까 안 되는 것 같단다(?). 광고비 상세 내용을 전혀 모르니 내 이름으로 품의하고 싶지 않다고 답하자 다시 알아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본인이 직접 올렸다. 보고를 무서워하고 회피하는 건 알지만 광고비 품의 정도는 직접 올려라...


8월 11일.

이직한 후배 D가 다니는 회사에서 홍보 담당자를 뽑는다. 지원해야 할 것 같다. 이제 한계다. 아니, 한계는 한참 전에 넘었다.


9월 10일.

최종면접을 봤다.


9월 13일.

오퍼레터가 왔다. 화장실에 가서 울었다.


9월 14일.

연봉협상이 끝나고 입사일도 확정했다.


9월 15일.

9시 땡하자마자 전팀장과 회의실로 가서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반응은 딱 예상한 대로였다. 갑작스럽네요. (모두가 예상한 퇴사일 텐데.) 저 때문이죠? (당연하지.) 어디로 가나요? (너 없는 곳.) 퇴사 이유가 뭔가요? (너.) 아무것도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 정말 안녕이다.


9월 24일.

가장 마당발인 직원에게 퇴사 소식을 알렸더니 전사에 퍼졌다. 그 과정에서 전팀장이 'D가 그만둔 원인은 사수(나)가 괴롭혀서'라고 말하고 다닌 걸 알게 됐다. D가 나를 불러 같은 회사로 이직한다는 소문이 나며 헛소리를 덮었다.


9월 28일.

마지막날. 대표님과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인수인계를 마쳤다.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도 가라는 얘기를 하지 않길래, 전팀장에게 이제 가보겠다고 말했더니 '에~에'라며 요상하게 인사했다. 참 너답다.


이것이 회고록의 마지막이다. 냉혹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런 사람도 돈벌이를 하는 것을 보며 이 세상이 의외로 녹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 사람을 꽤 많이 겪어봤다고 자부했는데 그는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그 유명한 '멍부'를 직접 겪고 나니 이제 어지간한 사람은 양반으로 보이며, '멍부'만큼은 이제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멍청하면 차라리 게을러야 한다. 부디 전팀장이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멍부'로 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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