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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루캐리 Nov 10. 2022

사람 때문에 퇴사해본 꼰대 ISTJ 이야기

힘든가요 지겨운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자발적 퇴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좇는' 퇴사와 '피하는' 퇴사. 연봉이나 커리어, 워라밸 등을 좇아 적극적으로 이직하는 편이라면 전자에, 사람 때문에 퇴사한다면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오늘은 '피하는' 퇴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나는 항상 사람을 피하기 위해 퇴사했기 때문이다.


나의 MBTI는 '꼰대' ISTJ다. 안전한 것을 선호하고 보수적이며,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보다는 이미 해본 일을 더 높은 수준으로 해낼 때 보람을 느낀다. 어지간하면 회사를 그만두거나 옮기기보다는 그냥 다닌다는 소리다. 충동적으로 퇴사를 결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업무량으로 인해 퇴사한 적도 없다. 오로지 사람이다. 사람 스트레스를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내미는 마지막 선택지가 바로 퇴사였다.


한때는 그런 나의 퇴사를 실패라고 여겼고, 스스로가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커리어를 좇아 이직하는 지인들과 나를 비교하면 한심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사람을 피하고자 하는 퇴사는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며, 어떤 면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퇴사다. 회사 사람과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여덟 시간씩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싫어도 가족이나 친구보다 자주, 그리고 오래 보는 사이다. 그런 사람이 날 힘들게 하는데 어떻게 무념무상으로 살겠는가. 물론 들이받아 이길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고작 들이받는 것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나를 힘들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피한다.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약한 것도 절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은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참고 참고 또 참고 무지막지하게 속을 끓이며 오만 생각을 다 한다. 그걸 방치하면 인간이 정말로 나약해진다. 피하는 것이 정면돌파일 수도 있다.


작년의 나는 갑자기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지금 당장 퇴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썩은 얼굴로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20대 때는 이직할 곳을 찾지 않고 퇴사를 선택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당장 미칠 것 같아도 그냥 그만둘 수는 없다. 틈틈이 퇴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어디 이직이 그리 쉬운 일이던가. 게다가 다니고 있는 직장의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지가 더 줄어들었다.


스트레스가 위험 수준으로 쌓였을 때 내가 선택한 것은 대표의 오른팔 격인 직속 임원과의 면담이었다. 면담은 '얘기해줘서 반갑다'는 말로 시작해 '도와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며 '일로 부딪히는 건 좋은 일이니 팀장을 계속 설득하라'는 이야기로 끝났다. 10년 차 직장인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귀찮으니 알아서 해.'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딱 예상한 반응이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면서 왜 굳이 면담을 요청했냐고? 우선은 '회사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건 나의 명분이었다. 회사가 나를 방임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정을 떼고, 포기하고, 나도 함께 방임하기 위한 명분.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6년 넘게 몸담은 회사에 대한 애정이 퇴색했다. 그곳은 더 이상 나의 직장이 아니었다. 월급과 간식을 주고 여름에 냉방이 잘 되는 공유오피스일 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첫 퇴사 때 혼자 참고 참다가 퇴사한 것을 조금은 만회해보고 싶었다. 고충 처리를 위한 정석적인 방법을 취해봄으로써 나름대로 발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힘들 때 왜 말하지 않았냐'는, 입에 발린 소리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다. 나의 퇴사 의사를 전해 들은 대표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나를 무시했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삐진' 사람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결국 퇴사하는 날 점심을 같이 먹자며 내가 먼저 말을 걸었고, 대표는 나를 근처의 스페인 음식점으로 데려가 '당신이 잘못한 게 있다'며 '힘들 때 왜 말하지 않았냐'를 시전하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덕분에 마음을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면담과 퇴사 사이에는 7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그동안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해봤다. 일시적으로나마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다른 회사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불합격할 때면 더 큰 좌절이 쌓이지만, 그래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기분이 좋았다. 월요일에 산 로또를 손에 쥐고 토요일을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서 머리카락이 빠질 것 같을 때는 자리에서 짐을 하나씩 빼 집으로 가져가거나 버렸다. 둘째 가라면 서러운 맥시멀리스트의 책상이 점점 깔끔해지기 시작했다. 인수인계할 내용을 미리 정리하는 것도 좋다. 다른 회사에 합격해 당당히 퇴사를 선언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업무를 정리했다.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거나 보완할 때도 도움이 됐고, 실제로 퇴사하게 됐을 때도 인수인계서를 금방 만들 수 있어 유용했다.


중소기업 재직자에 연 7회의 무료 상담 기회를 제공하는 고용노동부의 '근로자 심리상담 지원 프로그램(EAP)'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좋은 상담사 선생님을 만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막연하게 따뜻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냉정하지도 않은, 하지만 무척 다정하고 섬세한 선생님과 대화할 때면 '유레카'의 순간이 종종 찾아왔으며, 가끔은 별 신호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이번 퇴사가 20대의 그것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어린 나는 회사 사람들이 나의 힘듦(과 팀장의 이상함)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 알아준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 위안으로부터 나의 정당함에 대한 근거를 찾으며 한 달, 두 달 더 버틴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되지 않는다. 물론 많은 동료가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준 덕분에 숨쉴 수 있었고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잠깐의 휴식일뿐,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위안만으로 버틸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애로사항을 누군가가 알아준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너무 큰 위안을 받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내 글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 꼰대인 것도 마이너스인데 모순적이기까지 하다니. 그래, 나는 모순적인 꼰대다. 하지만 사람 때문에 퇴사를 고민하는 당신이 라떼처럼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하는' 퇴사를 선택한다고 해서 나약한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나를 살리기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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