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농구가... 아니 E가 되고 싶어요
나의 MBTI는 불변의 ISTJ다. 언젠가 MBTI 문항이 바뀌었다는 소식에 약간의 설렘을 품고 다시 검사했지만 역시나 ISTJ였다. S와 T, J는 망설임 없이 수긍하지만 'I'는 늘 목구멍에 턱 하고 걸린다. 이제는 내향적인 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때로는 나의 내향성에 대해 제법 쿨한 척을 할 수 있게 됐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E'를 동경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핵심에는 '관종'이 있다. 안타깝게도 내 안에는 관종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내향형과 관종의 조합은 비극이다. 시선을 갈구하지만 시선 앞에서 삐걱거리고, 만남을 피곤해하면서도 만남을 필요로 한다. 완연한 관종으로 살고 싶지만 내향형이라는 브레이크가 나를 자꾸 제어해서 오류가 난다. 마치 머리에는 흥선대원군이, 가슴에는 사대주의자가 살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래서인지 꽤 오랜 시간 동안 내향적인 나 자신을 미워했으며, 심지어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E'인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기까지 했다.
우연한 기회에 방문한 심리상담센터에서 나는 내향형 관종의 기질을 발견함과 동시에 점점 깊어져 가던 무의식 속 I 콤플렉스를 직면하게 됐다. 우선 TCI 검사 결과가 흥미로웠다. '위험 회피'의 모든 하위 항목이 높았다. 쉽게 말해 낯선 사람이나 상황에 두려움이나 수줍음을 느끼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었다. '관습적 안정성'도 높았다. 호기심이 많거나 변화를 좋아하지는 않고, 반복적 일상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경향이라고. 그런데 동시에 '무절제'와 '자유분방'도 높았다. 아니, 무절제하고 자유분방한데 위험을 회피하고 안정적인 걸 좋아한다고?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야 뭐야?
상담사 선생님은 "특정 분야에서 무절제하고 자유분방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본인도 혼란스러울 수 있다"며 "다른 사람이 볼 때도 어떨 때는 겁이 많은데 어떨 때는 자유로운 영혼일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명쾌할 수가. 가끔은 나도 나를 모르겠더니 이런 이유였구나. 게다가 친구들이 말하는 나와 100% 일치한다.
여기에 더해 유능감보다는 무능감이 높게 나왔는데, 그 무능감은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성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내향성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일부만 기록해봤다.
상담사: 내가 별로인 것 같아요?
나: 기본적으로는 그래요.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해요. 내향적인 내가 싫어요. 외향적인 사람처럼 보였으면 좋겠고, 그러려고 노력해요.
상담사: 아까 ‘기질은 좋고 나쁜 게 없다’는 것에는 공감하지 않았나요?
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요. 타고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려고.
상담사: 외향적인 건 괜찮고, 내향적인 건 별로인가요?
나: 외향적인 게 살기 편한 것 같아요. 좋고 나쁜 건 아니죠.
상담사: 그런데 본인은요?
나: 내가 내향적인 건 싫어요.
상담사: 다른 사람이 내향적인 건 어떤가요?
나: 다른 사람이 내향적인 것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충격을 받은 건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그러고 보니 내향적인 친구나 지인들을 나쁘게 생각한 적은 단 1초도 없었다. 그러면서 스스로한테는 그렇게 박하게 굴었다고? 이건 너무 말이 안 되고 나 자신에게 미안할 일이잖아? 그렇다고 타고난 기질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물론 한두 번의 상담만으로 모든 게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한 후에는 내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인정하려 하고, 때로는 조금이라도 극복하려 시도해봤다. 언젠가는 베스트프렌드의 친구들을 소개받기로 했는데, 막상 내 베프는 늦는다고 연락이 왔다. 모임 장소에는 초면인 사람들만 있는 상황. 내 안의 'I'는 편의점에서 친구를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자고 외쳤지만 용기를 내서 안으로 들어갔다.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장벽'을 넘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친구들과 함께 와인 파티를 가기로 했는데 모두 30분쯤 늦는다고 했다. 내 안의 용감한 자아에 힘입어 파티 장소에 도착했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이 20명쯤 모여있는 걸 보니 무력해진다. 그대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니,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어떡해? 늦게 도착한 친구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나 완전 찐따처럼 30분 동안 화장실에 있었잖아!
독서도 많은 도움이 됐다.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를 읽으며 내향성이라는 기질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 자신을 구박한 게 미안해서 자존감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행복한 이기주의자', '나는 생겨먹은 대로 산다',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로부터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지금도 가끔은 내향적인 내가 미워지려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나와 타인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내향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나 자신의 내향성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E가 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하지만 내가 I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나 혼자 음악을 듣는 출퇴근길이 좋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즐겁지만 집에 갈 때는 30분 정도 혼자 걷고 싶다. 자기소개를 할 때는 대본이 필요하다. 전화를 걸기가 싫어서 네이버 예약을 하염없이 뒤진다. 카페 사장님이 친근하게 말을 걸면 도망가고 싶다. 누가 봐도 내향형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내향형이 아니다. 내향형 관종이다. "I시라고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필요할 때는 에너지를 끌어올려 일시적으로 E로 둔갑할 수 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의 스몰톡에는 제법 자신 있다. 파티를 좋아한다. 여러 사람의 관심은 체할 것 같지만 서너 명까지는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향적인 찐따로 돌아간다. 뭐 가끔은 열받지만, 그래도 괜찮다. 왜냐하면 이제 내향적인 나 자신이 귀여워졌기 때문이다. 내향형이면서도 끝끝내 관종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발버둥 치는 게 얼마나 귀여워. 내게 I 콤플렉스를 완벽하게 극복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한 숙제다. 하지만 내 인생은 I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빛나는 관종이 될 나를 위해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