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 자격증 품목으로 주로 실습을 하기 때문에 나는 자격증도 모두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진로상담 때 선생님은 나에게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중에서 어느 쪽으로 취업을 하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하지만 그 정도의 요리실습을 한 것으로는 내가 어느 분야에 더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년이 더 지난 지금, 잘 안다고 할 순 없겠지만 조금씩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내 성격과는 어떤 요리가 잘 맞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
내 성격과 잘 맞는 건 중식이다. 한꺼번에 넣고 국자로 크게 크게 퍼서 넣고 단시간에 볶는 것. 참을성 없는 나에겐 중식이 내 성격과 비슷하다. 좋아하는 음식과 만들어보고 싶은 음식은 대부분 양식이다. 파스타를 정말 좋아하고 이쁘고 멋있는 접시에 소스와 메인 메뉴가 플레이팅 된 것을 보면 따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일식은 깔끔하고 단정하지만 비싼 식재료가 많고 딱히 일식을 많이 좋아하지 않아 관심도가 적다.
한식은 너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해서 존재 자체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그렇게신경도 안 썼던 한식을 인지하게 되는 사건(?)이 있다. 레시피를 보지 않고 감으로 도라지, 고사리나물을 만들어야 했는데 '간, 설, 파, 마, 참, 깨, 후'라는 공식, 도라지는 쓴맛을 제거해야 하고,갈변되니까 설탕물에 담가놓는 것 등을 자잘한 것들만 어설프게 알고 있었다. 결과물은 뻣뻣한 고사리나물, 조금 쓴 도라지 무침, 그랬던 것 같은데, 뒤통수를 맞고 깨닫게 되는 기분이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는 교훈을 얻게 된 것 같달까.
봄에는 시금치, 쑥, 봄동, 유채, 달래, 두릅 등 나물이 풍부하다. 그래서 나물들이 쌀 거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50g 정도 되는 한 봉지에 2000원이나 했다. 시장에서 검은 봉지에 가득 담아도 3000원일 거라는 생각을 해서인지 고기보다 비싸게 느껴졌다. 그래도 무엇을 사지? 고민하는데 시금치나물은 너무 식상하고 두릅튀김은 튀겨야 하고, 달래장은 요리가 너무 간단해서, 익숙지 않은 유채를 골랐다.
유채나물된장무침
유채 줄기 대가 뻣뻣하고 좀 단단해서 시금치보다 더 오래 데쳐야 한다. 대를 눌렀을 때 조직이 파괴될 때까지 데쳐야 한다. 양념장을 넣고 손으로 조물조물 나물을 무친다.
어릴 적에 엄마가 레시피를 보지 않고 감으로 툭 툭 넣고 요리하는 게, 나이가 먹으면 생겨나는 삶의 지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나이가 먹으면 생겨나는 게 아니라 반복해야 생기는 지혜라는 걸 느낀다. 반복하지 않으면 나이 먹어서도 레시피를 찾아보게 될 텐데 나는 툭 툭 레시피 없이도, 맛을 보면서 이건 뭐가 부족하니까 소금을 더 쳐야겠다. 물을 더 넣어야겠다 하는 감각이 길러졌으면 좋겠다.
콩나물무침
콩나물은 데치지 않고 찐다. 콩 풋내가 나지 않도록 절대 찌는 동안에는 뚜껑을 열어선 안된다. 찌고 나선 재빨리 볼에 옮겨서 빠르게 식힌다. 그러면 아삭아삭한 콩나물 무침을 만들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 아주머니가 콩나물을 씻으면서 말씀하셨다.
콩나물을 씻을 때 물을 한다라이 많이 줘, 마이, 까뜩. 그러면 콩나물이 머리가 무겁기 때문에 아래로 딱 수그러진다고. 그러면 꽁지만 탁 잡고, 하나도 이게 껍질이 몸에 안 붙어. 꽁지가 딱 서여, 그러면 꽁지를 잡고 착착착 하며는 하나도 콩나물 머리를 갈릴 게 없어. 살살 제끼면서 한쪽으로 껍질이 떠내려가는 거라. 이걸 갖다가 막 손으로 주므리고, 털고, 갈린다고 막 디다보고, 하나씩 갈리는 그거는 효율적이지 못해.
일을 정확하게 하는 것보다 융통성 있게 빠릿빠릿 움직이는 게 중요한 일들이 있다. 예전에는 잘 몰랐다. 상추를 하나씩 씻을 게 아니라 한 움큼 집어 물에 집어넣고 흔들어주고 탁탁 물기를 턴다. 그러니까 하나 더 예를 들자면 부추를 3cm 정도로 썰라고 했을 때 일일이, 부추끼리 길이를 맞추는 시간에 공을 들이지 말고 길이가 맞지 않은 상태에서 눈대중으로 3cm씩 썰라는 거다. 그렇게 하면 맨 오른쪽과 맨 왼쪽은 길이가 제각각이겠지만 쓰임새가 부침개 재료라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거다. 하지만 쓰임새에 따라 가니쉬 같은 경우엔 주의해야 한다.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건 삶의 지혜를 넘어서 오랫동안 하면 스스로 터득하게 되는 정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