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레몬 한 봉지를 사서 레몬커드와 파스타를 만들고 아직도 레몬이 남았다. 검색해보니 레몬을 이용한 베이킹 요리가 많았다.사브레, 쿠키, 마들렌, 레몬 타르트, 파운드케이크. 레몬 파운드를 만들기로 했다. 식빵 틀만 있고 파운드 틀은 없어서 파운드케이크를 만들까 말까 고민했다. 페페론치노가 없으면 건고추를 쓰면 되는 그런 융통성을활용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실패를 했을 때, 내가 잘못 만든 걸 대체를 써서 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도 싫기때문이다.
성격이 급한 나는 버터를 실온에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딱 하고 싶을 때 시작해야 되는데 기다리느니 차라리 몸이 고생한다는 걸 알아도 시작하는 게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빠 다리로 앉아 두발바닥 사이에 믹싱볼을 끼우고 발바닥으로고정시킨다. 그 휘퍼로버터를 으깨면 휘퍼 사이로 버터가 들어가는데 믹싱볼 바닥에 휘퍼를 탁탁 치면 버터가 충돌하면서 휘퍼 바깥으로 나온다. 그러면 다시 으깨고, 바닥에 탁탁 치고 이 과정을 반복해서 버터가 풀렸으면 설탕과 계란을 넣고 아이보리색이 될 때까지 휘핑한다. 이 과정은 휘핑기로 해야 되는데 휘핑기가 없으니 팔 운동한다 생각하고 빠르게 섞어준다. 하는 도중에 휘퍼가 나가서 마지막쯤엔 휘퍼의 날이 두 개밖에 없어서 젓가락이며, 포크, 커피 젓는 도구까지 동원해가며 혼신을 불태웠다. 식빵 틀에 유산지를 깔고 틀에 반죽을 담는데 유튜브 영상과 달리 양이 너무 적어서 반체념하고는 오븐에 넣었다. 그리고 윗면을 가르기 위해 꺼냈는데 부풀었다..! 부풀었어!! 성공했어!!! 정말 감격적이었다.
케이크를 젓가락으로찌르고 시럽을 촉촉이 뿌려 스며들게 하고 슈가파우더와 레몬을 이용해 아이싱을 덮었다. 파운드케이크는 하루 숙성해서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해서 다음날 썰어서 먹었다. 언니가 맛보고,'그 거 알아? 옛날 동글동글한 빵 그거랑 맛 똑같아'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내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정말 그 맛이랑 흡사해서 그 뒤로 먹을 때마다 그 빵만 생각났다.
옛날 동글동글한 빵
나는 당근 마켓을 한다. 설정해둔 키워드는 틀, 제과, 제빵, 카메라다. 스피드가 생명이니 알림 설정까지 해두었다.
마들렌 틀이 알람에 떴다. 눌러서 들어가 보니 6구 틀 2개, 12구 틀 1개, 총 3개 틀이 있었다. 처음엔 다 사겠다고 했다가 이성을 되찾고 생각해 12구 틀 1개를 사기로 했다. 판매자분이 남구에 살고 내 알바도 남구여서 알바 가는 시간보다 좀 더 일찍 만나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비가 쏟아져서 택시를 타고 거래장소에 갔다가 또 택시를 타고 알바까지 가서 결국 비싸게 주고 산 거나 다름없게 됐다. 레몬을 꺼내보니 색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달걀에 설탕을 넣고 잔 거품이 나고 설탕이 미세하게 녹을 때까지 섞어주고 가루류를 체지고 녹 인버터를 넣고 섞어준다. 틀에 버터와 밀가루를 고르게 묻혔다. 그래야 반점 같은 게 생기지 않고 색이 고르게 나온다고 했다.
반죽이 12개 분량이 딱 맞았다. 오븐에 넣고 200도에서 4분, 170도에서 4분 구웠다. 배꼽이 아주 이쁘게 솟았다. 위에 아이싱을 입히는데 아이싱을 입히고 굳기 전에 잘게 부신 호두나 캐슈넛을 뿌리고, 슈가 글레이즈 말고도 초코, 녹차에 빠트려 색을 입히면 더 이쁘겠다고 생각했다.
마들렌도 하루 숙성하고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한다. 사실 파운드케이크랑 마들렌 둘 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으니까 만들어보지도 않았다는 게 싫어서 만든 것이기도 한데 둘 다 정말 골든볼 빵 맛이랑 똑같다. 들어간 재료가 비슷해서인 것 같다. 그래도 마들렌은 이뻐서 포장해서 선물로 주기 좋을 것 같다. 아주 뽕을 뽑아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