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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문 Sep 02. 2022

시간의 공백 채우기

흘러가는 시간에 추를 달아


창문을 열어놔도 더 이상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기가 됐다. 해가 떨어지면 손가락 사이로 미지근한 바람이 느껴지고, 마른 공기에 빨래 마르는 속도가 부쩍 늘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울 게 많지 않아 시간이 빠르게 흘러 간다기에 조금이라도 붙들어 보려는 일말의 노력으로 타임스탬프 찍듯 주에 한 번 쓰던 주기(周記)도 멈춘 지 오래다. 끄적끄적 적던 notion을 열어 보니 마지막 수정 후 계절이 벌써 수 차례 흐른 뒤더라.




며칠 전 사무실 근처 펠트 커피에 갔더니 카운터 근처 귀퉁이에 소셜 독서 플랫폼 텍스쳐에서 큐레이션한 도서 중 워커스 라운지 시리즈 3이 보였다. 감사한 기회로 306호에 입주하긴 했지만 정작 책이 세상에 나온 뒤로 거의 들춰본 적이 없어 긴가민가 한 차에 함께 있던 현구님이 "참여한 책 맞죠?" 라고 물어서 애꿎은 팔만 문질거리며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2021년 봄에 나왔으니 시간이 꽤 흘렀구나. 책을 들고 동네로 찾아왔던 편집장님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다 '저 곧 팀 옮겨요.' 라고 털어둔 뒤의 놀란 반응이 아직도 생생한데.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의 크고 작은 변화가 모두 신기하고 반가웠던 시기였고 계속 고민하던 프로젝트를 더 좋은 환경에서 규모감 있게 해낼 기회를 찾아 나선 참이었다. 몇 달 후에는 규모감 뿐만 아니라 속도감까지 더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만들었고. 매일 매일 낯선 파도를 타는 게 즐거운 시기였다.

그간 거친 프로젝트가 세 가지. 하나는 마침표를 잘 찍었고, 하나는 쉼표 아닌 쉼표를 찍어야만 했으며, 마지막 하나는 말줄임표로 마무리 지었다. 모두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냐고 하면 은연 중에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 중 'Experience is the name everyone gives to their mistakes.' 이 생각나긴 하지만 다루는 프로덕트, 조직과 동료, 일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낯선 경험과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틀림 없으니까.


몇 주 후에는 또 새로운 조직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이전 팀이 몇 차례의 조직개편을 거쳐 확장된 곳으로 가는 경우라 '새로운'이라는 수식어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떠나서 쌓은 1년 반의 실수(mistake)-내지는 경험(experience)이 앞으로의 좋은 양분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주말부터 날이 흐리고 다음주에는 아주 큰 태풍이 올 예정이란다. 오늘의 낮 최고 기온은 30도, 햇빛은 따사롭고 전형적인 초가을의 맑은 하늘이라 간단히 집을 정리하고 짐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낯선 친구가 추천한 브런치 카페에 들러 진짜 '브런치' 먹었다. 이어폰도 끼지 않고 주위 테이블의 대화 소리와 가게  음악 소리, 열린   거리의 소리를 적당히 리고, 오픈 샌드위치를 500원짜리 동전만하게 작게 작게 썰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현실감이 떨어지던 중에 마레 지구의 어느 브런치 카페에서  다소 신중해 보이는 식사를 관찰하던  테이블 사람들과의 대화가 생각나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고.

식사 후에는 잠시간 멍하니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떠올렸다. 무사히 귀국해서 빠르게 다음 준비를 하고 있다는 환모 오빠를 생각했고, 한창   비와 여러 행사, 모임에 참여하느라 바쁠 본주를 생각했다. 결혼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몇몇 친구들이 생각났고, 저녁  대학로에서 재회할 슬기는 점심 식사 맛있게 잘 했을까 궁금해했다. 사무실에서 공동 육묘 중인 고양이 사진을 보내온 보람 언니를 부러워했고, 야근을   같다는 나리 언니의 소식에 안타까워 했다.




저녁 때 볼 뮤지컬은 작년에 지인에게 건너 소개 받은 동갑내기-지만 여전히 서로 존댓말로 거리감을 두고 있는-혜인의 추천 작품이다. 이전에도 몇 작품 추천을 받았었는데 매번 관심 없는 척, 취향이 아닌 척 계속 거부를 하다 보러 가서 반하고 온 게 벌써 세 작품째이니 혜인은 이번에도 "앞으로 안 맞을 거 같단 얘긴 절대 하지 마요." 라고 한 마디 했다. 언제나 회전 소식이 놀랍지도 않단 반응이던 친구들은 유튜브 채널에 올린 커튼콜 영상을 보더니 "언제 이렇게 많이 봤어?" 하고 재차 물어왔다.


공연 전까지 간밤에 읽다 만 채사장의 <열한 계단: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을 마저 읽을 생각으로 챙겼다. 뮤지컬에 중세의 종교, 사상에 대한 은유가 몇 차례 나오는 터라 굳이 8kg이나 되는 짐 무게를 각오하고 얹어온 것이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계속 보다 보니까 내 인문학적 소양이 미천한 것도, 종교가 없는 것도 여러모로 아쉬울 때가 많다. 역사 속 인물이나 예술가들의 작품, 또는 그들의 삶 자체가 극의 소재인 작품이 많아서 더 그렇다. 물론 모른다고 해서 감상에 지장이 있는 작품을 '잘 만든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는가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아는 만큼 보이고 깊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단 생각이 자꾸 든다. 어릴 때 마지못해 읽고 흘렸던 고전 문학이 지금에서야 새롭게 보이고 흥미진진한 것도 연극, 뮤지컬 작품이 불 지핀 포인트들이 있고 말이다. 덕분에 공연을 보기 시작한 후로 삶이 조금 더 부드럽고 색색으로 빛나는 것 같다. 이런 게 예술의 힘이겠지.




주에 한 번, 영 시간 맞추기가 어려우면 격주에 한 번씩 요가 수련을 가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내가 내 몸을 버티느라 고통으로 가득한 하타요가 수련에 가기도 하고, 천천히 몸을 달래고 이완시켜 내적 평화를 주는 인요가 수련에 가기도 한다. 그저께부터 갑자기 한쪽 목줄기가 굳어서 잘 안 돌아가고 있어서 이번 주는 또 스킵하지만... 구순의 자가 호흡과 이족 보행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비록 더디고 불성실해도 아예 놓지는 말아야지 하고 또 나와 약속.


주위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주간일기 챌린지를 하는 지인들이 늘었다. 친구들 따라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는 나도 그쪽으로 가볼까 하고 고민하다가, '에이,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부끄러움을 안고 다시 브런치로. 이 또한 비록 더디고 불성실해도 아예 놓지는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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