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 초단편집
누군가는 지우고 싶고,
누군가는 붙잡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기억이 되어 얽혀 있다.
* * *
홍연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발로 걷어찼다.
“아! 그때 그랬으면 안 됐는데….”
기억의 파편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
.
.
종강파티로 신났고 흥이 올라 술을 좀 과하게 마셨다.
평소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그녀였기에 이런 일은 아주 드물었다.
“나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술 많이 마신 거 같아.”
휴대폰을 손에 들고 나온 그녀는 몇 분 전 와 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술 많이 마시지 마.]
최근 친구에게 소개받은 남자 민우였다.
홍연보다 두 살 연상인 그는 뽀얀 피부에 순수한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책 읽는 걸 좋아했고 감성적이지만, 고민상담을 할 때면 이성적인 조언을 했다.
홍연은 그런 민우가 좋았다.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
햇살이 좋다며 자체휴강을 하기도 했고, 바다가 보고 싶다며 훌쩍 떠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갖지 못한 그를 좋아했다.
그에게 답장을 써 내려갔다.
[많이 안 마셨어. 지금 뭐 해? 목소리 듣고 싶어.]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민우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종강파티 잘하고 있어?]
“응, 바로 전화했네?”
[목소리 듣고 싶다고 했잖아. 그런데 술 많이 마신 거 아니지?]
“당연하지. 애들이랑 얘기만 하고 있어.”
[목소리가 술 좀 마신 거 같은데? 언제 끝나?]
“몰라, 아직 한창 얘기 중이야. 오빠는 뭐 해?”
[나? 오늘은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집에 있어.]
“에? 오빠는 공강파티 안 해?”
[친구들은 한다고 모였는데 안 간다고 했어. 가고 싶을 때 가면 되지 뭐.]
별것 아닌 대화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이 시간이 설렌다.
[그럼 끝날 때 즈음 전화해 줘. 데리러 갈게.]
“진짜? 진짜지? 나 그럼 끝날 때 전화할게.”
홍연은 웃으며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잔, 두 잔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설렘은.
조각난 기억엔 민우가 홍연을 데리러 왔었고, 그를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는 거다.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다 민우의 등에 업혔다.
속이 좋지 않아 참고 참았지만 민우의 어깨에 실례를 했다.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한 뿐이었고 민우는 애써 괜찮다고 말했다.
.
.
.
눈을 뜨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온몸이 쑤셨다.
입이 텁텁했고 얼굴이 찝찝했다.
간밤의 일이 떠올랐고 얼른 휴대폰을 켰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건 홍연이었다.
- 어눌 델ㅕ다젓 ㅓ고망ㅝ
순간 귀까지 빨개졌다.
민우는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미쳤어. 미쳤어. 진홍연.”
홍연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 * *
정숙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창가에서 보냈다.
병원에 마련된 창문은 그녀와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엄마! 오늘도 거기 있어? 담요라도 덮고 있으라니까.”
홍연은 무릎담요를 건넨다.
“딸, 학교 끝나고 온 거야?”
홍연은 잠시 멈칫한 다음 미소 지었다.
“그럼~ 엄마, 오늘 무슨 요일이게?”
정숙은 검지손가락으로 허벅지 위를 그린다.
그건 마치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보이기도 했고, 머릿속 기억들을 지휘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정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오늘 무슨 요일이니?”
“금요일이잖아.”
홍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보았다.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매화를 보는 듯했다.
“그게 무슨 대수니?”
“우리 박 여사 오늘 왜 이렇게 심술이 났어? 누가 그렇게 화나게 한 거야?”
홍연은 엄마가 왜 그런지 알고 있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는 거다.
젊은 나이 치매에 걸린 엄마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처음 모녀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검사결과를 듣던 정숙은 되물었다.
“그냥 건망증 아닐까요? 저 아직 젊어요. 깜빡깜빡할 뿐이에요.”
“어머니, 검사결과로는 초기입니다. 약 드시면 진행속도를 늦출 수 있어요.”
“다시, 다시 한번 더 검사해 보면 안 돼요? 저 아직 젊어요.”
엄마는 정중한 절규 외쳤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그 후 상황은 악화되었고 엄마는 최근의 기억부터 서서히 잃어갔다.
홍연은 그 과정을 겪으며 수도 없이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엄마는 여전히 젊었고 기억을 붙잡고 싶어 하지만 간혹 저 멀리 떠난다.
그럴 때면 홍연은 엄마가 영영 떠날 것만 같았다.
엄마 손을 잡아 따뜻한 온기를 확인하고서 안심이 되는 밤이 많았다.
직장 생활에 지치더라도 매일 엄마를 찾아왔다.
눈에 조금이라도 담고 싶었다.
건강할 땐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 한 번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
그 흔한 가족사진도 몇 장 없었다.
“엄마, 여기 봐봐.”
“뭐야? 사진 찍는 거야?”
엄마는 카메라를 보고 기분이 풀렸는지 환하게 웃는다.
“동영상 찍고 있어.”
“응? 웬 동영상이야. 사진인 줄 알았는데.”
“우리 예쁜 박 여사 많이 남겨두려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기록으로 남겨 둔 게 별로 없더라고.”
“에이, 참. 화장도 하고 예쁘게 꾸민 다음에 찍으면 안 돼?”
“그러면 더 좋지. 그럼 엄마 화장 도와줄까?”
“그래, 우리 딸한테 화장이나 받아보자.”
홍연은 화장품을 꺼내 엄마의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자신을 키우느라 고생한 주름 위 화장을 펴 바르고 겨울의 흔적을 지워낸다.
화사한 색으로 과하지 않게 그림을 그려가니 엄마의 얼굴에 봄이 피어난다.
“자! 어때? 새색시 같지?”
정숙은 거울로 요리조리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 다시 환하게 웃는다.
“한 10년은 더 젊어졌다. 이렇게 밖에 나가면 엄마가 아니라 언니라고도 하겠다, 얘.”
누군가는 지우고 싶고, 누군가는 붙잡고 싶은 기억이 있다.
우리는 각자의 기억 속에 살아간다.
그리고 그 기억은 서로 얽히고설켜 작은 이야기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