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풍 Oct 30. 2022

소설 환취 (25화/25화)

25. 외전 - 관찰 일지 (문 노인의 머릿속)

25. 외전 - 관찰 일지 (문 노인의 머릿속)


 어떤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이야기는 펼쳐질 예정이었다. 거무스름한 하늘에선 비라도 막 쏟아질 듯했고, 초저녁의 서늘한 바람이 휑한 공간을 휘저으며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 속, 도로를 따라 쭉 뻗은 인도의 시작, 그 앞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백발의 노인과 그 노인을 많이 닮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둘은 나란히 선 채로 인도의 끝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노인을 보며 이야기했다.


"길이 이렇게 길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리고 기억도 잘 안 나."


아무 말 없이 인도의 끝을 응시하고 있던 노인도 고개를 천천히 돌린 뒤, 중년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조금 길게 만들었어. 세월이 그만큼 지났잖아…. 걷다 보면, 그때 기억들이 하나씩 생생하게 머릿속으로 들어갈 거야 거야. 나도 그때 남은 사진들을 보면서 떠올리기 시작할 테니까."


"이게 될까? 난 영 확신이 안 서."


"될 거야. 분명 될 거야. 내가 이제 얼마나 살겠어. 분명 돼야 해."


"이런다고 현실이 달라질까?"


"과거에 남겨진 중요한 사실들은 모두 그대로 둘 거야. 답을 찾으려는 것뿐이야. 그러니 땅콩이를 이야기 속에서 살리려고 하지 마. 소용없는 짓이야."


"그래? 그때를 재현하면서 답을 찾아가는 거야? 나 혼자? 그럼 결과도 똑같을 거 아니야."


"그래. 맞아.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은 모두 똑같을 거야. 몇 가지 허구를 넣었지만 오직 너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야. 혼자서는 힘들어. 내가 도울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돼. 나머진 내가 준비해 놓을 게."


"그런가….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허구라…. 그런데 어떻게 도울 건지 말해줄 수 있어?"


"메시지를 남겨 놓을 거야."


"메시지? 어느 시점에 어떤 행동을 하라는 지령 같은 거야?"


"네가 필요한 시점에 메시지를 보면 알게 돼."


"어떤 멋진 말 같은 거야? 그런 거 좋아했었잖아."


"아니, 멋지지 않아. 나 이제 그런 거 안 좋아해. 늙어선 소용이 없더라고. 이젠 내 멋이나 찾는 맛에 살아야지…."


"그럼, 감동적인 말 같은 거야?"


"아니, 감동적이지도 않아."


"그럼 도대체 뭐야. 웃기기라도 한 거야?"


"글쎄. 웃길 수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내가 유머감각은 없잖아. 보면 알게 될 거라니깐 왜 자꾸 물어봐."


"그래. 미안 미안, 유머감각은… 그렇긴 하지…."


"그리고 답을 찾게 되면 언젠가 다시 나를 찾아와 줬으면 좋겠어."


"그건 왜? 답을 찾으면 다 끝나는 거잖아. 넌 냄새에서 해방될 테고. 난 나대로 이야기 속에서 위령제를 끝으로 아름답게 끝내는 거 아니었어?  맞다. 시작하기 전에 내가 고양이랑 누굴 찾아갈 것처럼 운을 떼 놓으라고 해서 그렇게 하긴 했는데…."


"글쎄, 어떻게 끝날지 나도 이야기를 진행해 봐야 정확히 알 것 같네. 돌아오면 너한테 꼭 해줄 말이 있어서 그래."


"지금 해줘도 되잖아. 그리고 내가 땅콩이를 닮은 새로운 고양이와 살아가는 그런 걸 계획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럼 그 곁에 있다는 고양이는 뭐야?"


"나도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지만 너도 새로운 선택을 찾아야 돼. 그때의 기억들과 비교하면서 다른 선택지를 찾아봐. 지금은 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 나도 모르니까. 아마 달이 차면 알게 되겠지…."


"사전 정보가 너무 야박한데…. 그리고 달이 차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조선시대 선비도 아니고. 노년에 너무 이상한 데서 멋을 찾는 거 아니야?"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네. 길을 걸어가는 동안 기억들이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갈 거야. 좋은 기억들은 아니라 조금 힘들 수도 있어. 아무튼 이제 시작해…."


"그래, 긴 세월 그 냄새로 고생했다니…. 이번에 내가 가서 어떻게든 해볼게."


 중년의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시 인도의 끝을 바라봤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지 갑자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도 그를 따라 한숨을 크게 내쉰 뒤,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노인은 다시 중년의 남자에게 재촉하듯 말했다.


"어서 가! 어서!"


 중년의 남자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쭉 뻗은 인도를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어떤 기억들이, 그의 눈가를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속도를 줄여 힘없이 천천히 걸어가는 중년의 남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이 마른침을 크게 꿀꺽 삼킨 뒤, 그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마지막엔 반드시 이 길로 돌아와야 해! 고개 들고!"     


 중년의 남자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크게 끄덕인 뒤, 가슴을 펴고 자세를 다시 바로 세웠다. 그리고 인도의 끝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힘차게 바꿔나갔다.


 노인은 그의 뒷모습이 마치 임무를 띠고 마왕성을 향해가는 용사의 그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향해 노인이 크게 외쳤다.


"어서 시작해! 어서!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등 뒤에서 노인의 외침이 들려오자, 중년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았다. 그리고 뒤돌아 노인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듯, 그대로 팔을 들어 보였다. 꼭 모은 두 손엔 너무 힘을 주어서인지, 팔까지 부르르 떨렸다. 노인도 그에 응답하듯 똑같이 두 손을 모은 뒤, 그를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곧이어, 다시 앞을 향해 걷던 중년의 남자는 어느새 굳어있던 얼굴의 근육들을 모두 풀어내, 빙그레 미소를 지어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이야기하기 참 좋네요.

그럼 '심심풀이 땅콩' 같은 이야기, 한번… 한번 시작해 볼게요."


[소설 환취 외전 - 끝]




작가의 이전글 소설 환취 (24화/25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