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에는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사진이 포함되어 있으니, 읽으실 때 주의를 부탁 드립니다.
'언젠가는 내 때가 온다...!'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새해가 되고 글을 쓰려고 가방을 짊어지고 카페에 와보니, 여전히 백수인 상태로 새해를 맞은 내가 초라하고 두렵다. 지난 1년은 분명히 불확실과 불안을 견디는 시간들이었다. 불확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학부시절 경제학을 전공한 내 입장에선, 경제학 이론에는 예외없는 논리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합리적인 결정이란,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는 원칙을 포함한다(이래서 경제학을 배우기를 그만뒀다). 어둡고 비통한 소식이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시기다. 내가 겪지 않은 일을 애도하는 각자의 방식을 목도한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인간은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인간이 그토록 확실성을 선호하는 존재라면, 눈 앞에 닥친 거대한 불확실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일단 주가와 환율은 출렁이는 식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시스템도, 어떤 경향도 따르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이나 양식에 관심이 없다.
난 어떤 확정된 것을 피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66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는 지금은 '살아있는 현대미술 작가 중 최고가 작품' 같은 문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리히터는 드레스덴, 그러니까 과거 동독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몇 달 전 서독으로 탈출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두 종류의 전체주의를 모두 겪은 리히터는 하나의 고정된 양식과 언어를 극도로 싫어했다. 심지어 "나는 스타일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스타일은 폭력이고, 나는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도 했다. 실제로 리히터의 작품 중 유명한 것들은 대부분 1960년대에 제작된 포토리얼리즘 회화들이다. 사진을 원본으로 했지만, 이를 회화로 제작하고 그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종국에는 어떠한 닫힌(closed) 결말이 없이 개방성(openness)만을 관람객에게 남기는 작품들이다.
가장 잘 알려져있는 <1977년 10월 18일> 시리즈를 살펴보면 위의 설명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1977년 10월 18일에 독일의 테러리스트 집단인 적군파(RAF; Rote Armee Fraktion)의 핵심세력이 모두 감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는 독일이 여전히 전쟁과 분단이 남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이 날의 사건을 작품화한 전시 자체가 맹렬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작품화한 대상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기 때문에 테러조직을 미화한다거나 이들을 영웅화 한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었다. 물론 이에 대해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자신은 어떠한 정치적 이념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의견을 밝혔다.
조금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실제로 뉴스에 실렸던 기사 사진을 가져왔다. 오른쪽의 두 개의 도판(도판 2, 3)이 리히터가 원본 사진을 바탕으로 경계를 흐리게 해 제작한 작품들이다. 리히터는 '사진은 어떤 현실에도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지만, 회화는 현실에 개입한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카메라는 대상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지만, 작가의 손으로 직접 그린 회화는 현실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함으로써 현실을 왜곡시키고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사진에 매혹된 이유다. 원본으로 만든 회화의 경계를 흐리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모호하게 만들면서, 끊임없이 작품은 사진과 회화의 경계에서 진동한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회색을 사용해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함과 거리두기를 표현하면서도, 작품 앞에 선 관람자는 그 시대정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감옥에서 목을 매 사망한 채로 발견된 적군파의 핵심 세력이었던 군드룬 엔슬린 역시 마찬가지다. <Hanged>(도판5)에서는 흐릿한 방 안에 사람의 형체를 한 것이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만 보이지만, 실제 이 회화는 왼쪽처럼 목을 맨 사진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토리얼리즘은 '회화를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보이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와는 무척이나 대조적으로 리히터의 포토 리얼리즘 회화들은 '현실을 흐리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 점이 바로 기존 미술의 문법을 부수고 전통에서 비켜나가고자 하는 리히터의 당시 작업관을 잘 보여준다. 전쟁 이후로 물결치던 앵포르멜의 흐름에서 벗어나고, 색채, 창조, 형상과 같은 기존의 회화 문법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열심히 스케치하고 완성한 회화를 문질러버리는 것은, 정성껏 쌓은 것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행위다. 리히터의 작업에서 양식상의 문제는 곧 그의 사유와 일치한다.
<Dead> 시리즈는 독방에서 수감되었다가 자결한 마인호프의 사진을 회화로 만든 것이다. 바닥에 누워있는 차가운 시신과 목에 있는 선명한 줄, 어두운 배경은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당시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마인호프(1934~1976)는 국가의 적 그 자체로, 독일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테러수괴였다. 그런 마인호프가 학생시절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며 "결코 총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파괴할 뿐이다"라며 평화와 반전(反戰)을 외쳤다는 것은 모순적인 일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리히터는 마인호프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인 32세 때의 초상사진을 사진회화로 그려냈다.(도판8) <청소년 초상>이라는 이 작품의 원본이 된 마인호프의 사진은 그가 RAF에 동참하기 전, 1966년에 찍힌 것이었다. 리히터는 의도적으로 이 초상화를 더 젊은 모습으로 그려냈다. 마치 격변의 시대적 환경과 이데올로기가 한 개인을 어디까지 바꾸어놓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리히터가 결코 이들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었겠으나, 수많은 사람을 죽인 테러리스트도 이데올로기라는 개념 앞에서 피해자로 뒤바뀔 수 있다. 이념으로 인한 숱한 상처를 겪은 리히터는 아마도 이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 이념은 거의 항상 무모한 것, 무의미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한 것이었다. 역사가 준 상흔에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다루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개인의 삶은 어땠을까?
리히터가 그린 사진회화(도판9) 속에서 루디 삼촌(루돌프 쇤펠더, Rudolf Schonfelder)은 밝게 웃고 있다. 흐릿한 이미지 속 군모에서 나치스의 표식인 하켄크로이츠를 볼 수 있다. 리히터의 외삼촌인 루디 삼촌(도판9)은 나치 군대에서 복무했고, 교전 중 사망했다. 루디 삼촌은 외도를 하고 혼외자를 낳아 자신에게는 없는 사람이자 다름없던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채워준 리히터의 영웅이면서, 집안의 자랑이었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 그리고 온 가족의 사랑을 받았던 외삼촌을 추모하는 것은 전후 독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기리고 애도하고 싶은 개인적인 마음과,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 없는 공적인 죄의식의 충돌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무겁다.
<이모 마리안느>(도판10)에서 생후 4개월인 리히터를 안고 밝게 웃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는 리히터의 이모, 마리안느다. 마리안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나치스의 정신병자 실험 일부로 연구소에 보내져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은 후 그 곳에서 사망했다. 나중에서야 리히터의 장인이 과거에 이 일을 집행하던 의사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많은 파시즘으로 얼룩진 독일의 역사와 개인의 비극, 이념 갈등의 산 증인으로서 그에게 어떤 종류의 슬픔은 결코 애도 불가능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 특정 인물들은 죽었다.
죽음은 아주 보편적인 의미에서 이별이고,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도 사회가 허락치 않은,
삶을 바꾸려던 특정 교의에서의 이별이며 더 나아가서는 환영에서의 이별이다.
- 게르하르트 리히터
리히터의 작업은 어떤 사람들은 결코 겪어보지 못했을 슬픔과 트라우마 앞에 사람들을 서게 만든다. 그 사진회화들은 깊은 슬픔과 상흔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하게 한다. 모든 확정된 것, 미디어가 단정한 것, 역사가 기술한 것 전에 슬픔이 있음을 알린다. 이건 경찰이나 기자들의 기록사진으로는 불러낼 수 없는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애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리히터의 작업이 마음 아픈 지점은, 자신의 애도 불가능성을 타인의 애도 가능함으로 치환했다는 점이다. 이 1977년 10월 연작 이후, 리히터는 더이상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다른 양식으로 작업의 방식을 선회했다. 리히터가 그랬듯이, 지난 역사가 그래왔듯이, 우리는 다른 방식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