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는 이스탄불과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정도의 도시만 알고 있었고 튀르키예 남서쪽 도시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튀르키예를 여행을 결정한 후 본격적으로 정보를 검색하던 중 튀르키예 남서쪽 도시들을 알게 되었다. 쿠사다시(Kusadasi), 카쉬(Kas)와 보드룸(Bodrum)등. 모두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도시 이름이었지만 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귀여운 골목들, 골목을 따라 늘어선 조금 작고 낮은 건물들, 그리고 건물과 골목 사이를 수놓은 아름다운 핑크빛 꽃들과 해변. 이곳이 튀르키예라고?
나는 튀르키예 남서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튀르키예 여행 일정을 전면 수정했다. 사진을 보고 카쉬와 보드룸이라는 도시에 반해버렸지만, 파묵칼레가 있는 데니즐리(Denizli)와 함께 가려고 하니 일정이 좀 애매해졌다. 그래서 카쉬와 보드룸을 포기하고 페티예(Fethiye)와 쿠사다시(Kusadasi)라는 도시를 추가했다. 그리고 디뎀이 체쉬메(Cesme)라는 도시가 있는데 매우 아름답다고 알려주어서 그 도시도 일정에 추가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튀르키예 남서부 여행이 시작되었다!
파묵칼레는 예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석회 성분을 품은 물이 지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면서 눈처럼 흰 석회층이 겹겹이 쌓여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경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 물은 실제로 피부병이나 질병 치료에도 효능이 있어서 고대 로마 황제들과 로마의 귀족들이 이곳으로 온천여행을 와서 쉬다 갔다고 한다. 각각의 층으로 이루어진 물웅덩이는 아주 따뜻했고 앉으면 가슴팍 정도까지 왔다. 여행의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파묵칼레 온천지대가 높아서 온천을 하며 조용한 도시를 내려다보는데 약간의 집들과 나무, 그리고 광활한 들판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의 경치가 예술이었다.
파묵칼레에서 묵은 피로를 풀고 난 후 우리는 쿠사다시로 향했다. 쿠사다시의 에어비앤비에 체크인하고 도시를 한번 둘러보기 위해 바닷가 쪽으로 가서 산책했다. 해변을 끼고 공원이 넓게 잘 조성되어 있었고 공원 건너편으로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리는 가족들, 여행자들 그리고 거리공연을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해변 마지막 끄트머리에 낮은 언덕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언덕에 오른쪽 위쪽에 커다랗고 하얀 글자로 도시 이름 ‘Kusadasi’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부산과 같이 언덕 위에 빽빽하게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의 페인트칠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왼쪽부터 오른쪽 끝 건물까지 2~3채에서 5~7채 정도 되는 집들이 열에 맞춰서 파란색, 민트색, 연두색, 노란색, 오렌지색으로 그러데이션 한 것처럼 칠해져 있었다. 그래서 멀리서 봤을 때 이 건물들이 한 덩어리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언덕 아래쪽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크루즈 선박이 정박하여 있었고 유럽에서 지중해 크루즈를 선택한 부유한 유럽인들을 가득 싣고 이곳에 내려다 주었다. 해변을 벗어나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곳 장사하시는 분들은 그 부유한 유럽인들 지갑을 열게 하려고 유로로 가격을 책정했고 덕분에 물가가 굉장히 비쌌다. 안탈리아 골목에 한 가게에서 모자를 100리라(8,000원) 정도 주고 샀는데, 모자를 잃어버려서 이곳에서 다시 사려고 하니 가장 저렴한 모자가 10유로(15,000원) 정도 했다(2022년 5월 말 환율기준). 거리에는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온 백인 노인들로 가득했다.
쿠사다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30분 정도 떨어진 셀축이라는 도시에 있는 고대 로마 도시의 유적이었다. 고대 도시가 너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마치 시간여행을 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쿠사다시를 떠나 디뎀이 추천해 준 도시, 체쉬메로 향할 때 우리는 이즈미르에 가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체쉬메에서 예약한 에어비앤비는 친구의 집처럼 아늑했다. 진심으로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행복했다. 깨끗하고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고 버스정류장, 해변, 번화가 거리와도 가까웠다. 항구를 따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고 거리는 꽃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곳은 다른 나라 여행자들이 잘 보이지 않고 튀르키예 자국에서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레스토랑에 가도 튀르키예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물가도 훨씬 저렴했다. 모든 기념품은 튀르키예 현지 통화인 ‘리라’로 가격을 책정하였다. 음식점도 유럽인들의 입맞이나 가격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쿠사다시보다 훨씬 편안했다. 튀르키예 남부 도시 중 체쉬메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그렇게 일정을 짜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쉬메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알라차티(Alacati)라는 마을로 갈 수 있다. 알라차티 마을은 온통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고, 레스토랑, 옷 가게, 기념품가게들이 빈틈없이 골목을 뒤덮고 있다. 가게마다 다양한 빈티지 인테리어로 꾸며놓았는데 걷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골목의 천장, 벽들 그리고 가게의 테이블마다 꽃장식이 가득했다. 나는 아기자기한 골목을 걷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튀르키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이 바로 이 알라차티의 골목이 아닐까 생각했다.
체쉬메와 알라차티를 여행하면서 가슴 벅찬 감동 따위는 없었지만, 그냥 편안했다. 가끔은 이런 순간이 필요하다. 그냥 그걸로 되었다.
예전에 오소희 작가님이 쓴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라는 튀르키예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분은 느리게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여행하셨는데 작가님은 튀르키예에서 올림포스가 가장 좋았다고 하셨다. 그녀의 글로 미루어 보아 관광객으로부터 좀 더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과 장소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얼마나 좋으셨던지 파타라로 가셨다가 다시 올림포스로 돌아가셨다. 오소희 작가님은 ‘카쉬’라는 도시에 대해 유럽 어딘가를 흉내 낸 거리 전체가 하나의 개성 없는 공원이라고 말씀하셨다.
‘오소희 작가님은 아마 체쉬메나 알라차티를 싫어하셨겠지?’
아마 작가님이 체쉬메와 알라차티에 오셨다면 이렇게 느끼셨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진으로 봤던 카쉬의 골목 모습이 알라차티의 골목과 약간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터키의 남서부 지역 소도시들이 유럽을 흉내 냈다기보다, 그리스와 아주 오래전부터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기 때문에 그리스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그런 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계여행을 다니며 10번 이상 튀르키예에 왔는데 쿠사다시가 너무 좋아 본인의 신혼여행지로 선택하였다는 블로거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읽고 쿠사다시라는 도시에 대해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그곳은 나와 별로 맞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내가 좋아하는 도시들이 마냥 좋다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좋았던 그 도시는 '나와 맞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행을 다니다 보면 본인에게 맞는 도시들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나도 변하고, 도시도 변하기 때문에 이 도시가 나와 항상 맞는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내가 이 나이에, 이 시간에, 지금 나와 잘 맞는 어떤 도시에 와 있기 때문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 편안함, 행복감을 느낀다.
관광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또 반복적인 패턴에 피곤해지고, 힘들어질 텐데 이 좋은 느낌은 일상에서 잠시나마 버틸 힘을 준다. 그리고 나중에 또 나와 맞는 도시를 찾아 떠나게 될 꿈을 꾸게 만들어 주어 일상에 활력을 준다.
미래의 나는 또 어떤 도시를 좋아하게 될까? 미래의 내가 만날 도시와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들로부터 또 무엇을 배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