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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 Apr 15. 2021

음주 후 글쓰기

나의 취중진담을 위하여

“아, 아버지, 그대에게는……. 아니 ‘당신께는’이라고 말해야겠네요.

시인에게 술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머니가 아셔야 할 텐데요!”

<발췌-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옛 선인들은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고 앉아 남풍을 맞으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세상에 출현된 수많은 걸작들이 진정한 풍류 속 술잔에서 나왔다고 본다.

 

요즈음 전에 없던 술버릇 하나가 생겼다. 술 마시고 들어온 날에는 목욕재계를 하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글을 쓴다. 난 음주와 함께 글을 쓸 만큼 술에 애정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술 마실 때의 분위기에 취해 그 취기가 가시기 전에 무엇인가를 기록해 놓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음주 후 쓴 글들이 풍류 속 흥에 못 이겨 명작이 되길 바라고 쓴 것은 아니다. 그냥 알코올 중독처럼 글 중독 언저리쯤이라고 하는 게 적당하리라.

아니면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어쨌든 평소엔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가 술 마신 후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내 마음의 진심을 듣고 글을 쓰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 나 불안해할지도 몰라.

하지만 꼭 오늘 밤엔 해야 할 말이 있어.

<발췌-전람회의 노래 ‘취중진담’에서>

 

 <에세이라는 걸 써야지> 하고 마음먹었을 때 내가 웬만하면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몇 가지 항목이 있다.


첫째, 남편 이야기

글 앞에 진심이기로 다짐한 내 마음에 왠지 포장지를 하나 덧씌워 세상에 내놓아야 할 대상이다. 만약 포장지를 다 벗기고 남편에 대한 솔직한 내 감정을 글로 쏟아 냈다간 그건 글이 아니라 고해성사라 칭해야 할거다.

(한 인간을 이렇게 절절히 미워하는 저를 용서하소서) 

20년을 살고도 앞으로 더 살아야 할 내 남편이기에 남편을 욕보이는 일은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라 아직까지는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괜찮을 만큼 강한 정신적 내공 쌓기까지의 수련은 덜 되었다.  


 둘째, 세상에 나오는 것보다 묻혀지는 게 좋을 이야기

불혹의 나이를 거치다 보니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게 나을 때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손에 의해 글이 쓰이는 순간 내용과 연관되는 사람들이 힘들 거라는 지레짐작이 나를 도리질하게 만든다.

아직까지는 내 글로 인해 파란이 일어나길 바라진 않는다. 성스러움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마음 밑바닥에 옅게 깔려 있는 순수 정도는 묻어나길 바란다.


셋째, 내가 소재로 삼는 사람이 상처 받을 수 있는 이야기

이런 걸 세속적으로는 뒷담화라 칭할 수 있겠다. 개인에 대한 미움은 마음에서만 품고 있다 보면 언젠간 흩어지다가 점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글로 풀어 세상에 드러내 놓고 보면 그 사람과 나 사이는 영영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다.

글의 귀결은 선한 끝이어야 한다고 본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는다면 그런 글은 애초에 쓰여 져서는 안 되는 거다.


 넷째, 나를 드러내 놓고 <어리석었소> 하는 이야기

본인의 치부를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남의 흉이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듯이 내 허물은 두고두고 흉터처럼 남아서 나를 후회하게 한다. 이런 걸 글로 쓰면 왠지 되새김질로 상처를 더 후벼 파는 마음이 들 것 같다. 그래도 어느 순간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내 어리석음도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인생의 한 부분이었구나>를 진심으로 깨닫게 되는 날이 오면 취중진담처럼 비우고 싶은 날이 오겠지.

 

다섯째, 제어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 감정을 쏟아내는 글

난 성격이 급하다. 그냥 급한 게 아니라 매우 급해서 생각과 함께 행동을 하고 생각과 함께 말을 한다. 그리고 후회를 하고 급수습을 하고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예전에 심리 상담 비슷한 걸 받은 적이 있는데 어떤 일에 대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 말라고 했다. 꼭 하루라도 신중히 참았다가 결정을 하라고.

글 또한 그렇다.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써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한 번도 걸러지지 않은 상태의 감정 쏟아냄이라면 분명 독자는 내 불편한 감정을 글에서 고스란히 받아낼 게 뻔하다. 그렇지 않아도 극소수의 독자들이라 귀한 인연인데 그 인연들의 감정을 순간이나마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바람이다.

 

나는 왜 대체……

저 수많은 이야기들은 쓰지도 않을 거라 정해 놓고 꾸역꾸역 진심을 토해내겠다고 노트북을 펼쳐 든 걸까?

음주 후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바로 잠들어 버리는 내가 편하게 잠들지 못하고 글을 쓰겠다고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지 사실 나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겠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처럼 속엣말을 못한  이발사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갈대숲에 비밀을 발설하듯이 내 노트북에 타박타박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가다 보면 감정이 해소되는 것과 비슷한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술 마시고 들어온 바로 지난날 난 <고백 부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 날 이 이야기를 왜 썼는지는 내 노트북에만 기록으로 남았다. 아마 눈치가 빠르고 이 드라마를 시청한 독자라면 내가 굳이 이 드라마를 끌어다가 주절주절 취중진담이라고 풀어댔는지 글을 읽지 않아도 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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