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일주일 전 그날, 참았어야 했다.
순간 욱 하는 마음으로 일 년 동안 냉장고 한편에 묵혔던 맥주를 집어 들지 말았어야 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맵시 나게 청바지를 입겠다고 지난 일 년동안 얼마나 내 뱃살과 옆구리 살들을 꽉꽉 눌러댔던가.
며칠 동안 이리저리 뒹굴리던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 마음의 열기를 가라앉혀 보겠다고 냉장고 구석에 숨어있던 맥주 한 캔을 냉큼 꺼내 들었다.
아주 찰나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이내 캔 뚜껑을 따고 일 년동안이나 숨어있던 흰색 냉기가 세상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순간 쾌감을 느꼈다.
캬아~이 맛이야!
차가운 맥주 깡통을 잡는 순간부터 갈증의 반은 이미 해소된 느낌이었다.
한 여름밤의 맥주는 참으로 유혹적이다. 이글거리는 한 낮 태양에 맞서 네 까짓 거쯤은 한 방에 날려 버려 주겠다는 최고의 당당함을 갖춘 음료가 아닐는지. 타는 목마름을 단번에 싹 가라앉혀주는 맥주 맛을 모르는 사람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런 알싸한 행복을 날마다 누릴 수 있는 필요충분의 조건을 갖춘 여름의 나라 말레이시아에서 일 년 동안 꼼짝 못 하고 머물게 되었다. 시시 때때로 수많은 종류의 맥주가 유혹했지만 애주가인 난 청바지 한 번 예쁘게 입어보고 늙겠다고 침을 꼴깍 삼켜가며 참고 또 참아왔다. 물론 일 년 동안 술을 딱 끊었던 건 절대 아니다. 중년의 저물어가는 쓸쓸함을 우아함으로 승화시키겠다며 용량 대비 알코올의 지수가 더 높은 와인을 종종 마셔왔다.
하지만 맥주가 주는 청량하고 경쾌한 시원함은 어떤 알코올로도 대체될 수가 없다. 오랜 갈증을 기어이 맥주가 아니면 풀어질 것 같지 않을 때 운동복 차림으로 나가 동네 한 바퀴 뜀박질로 열량을 뺀 후 안주는 사절하고 생맥주 한 잔으로 몸의 열기를 식혀왔다. 딱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리면 그동안의 수고가 맥주 거품처럼 사그라들까 봐 참았다.
맥주 한 잔의 열량은 밥 한 공기와 맞먹는다고 한다. 그날 중국에서 같이 일하는 파트너 리샹과 며칠 동안의 갈등 때문에 발동이 걸렸으면 딱 한 캔에서 그쳤어야 한다. 기네스의 쌉쌀하고 달콤한 흑맥주로 시작한 달달한 여운이 끝내 아쉬워 냉장고 문을 열고 구석의 맥주 한 캔을 더 잡아든 것이 아시히였다. 아시히의 톡 쏘는 맛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달달한 끝 맛이 주는 아쉬움을 아사히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 주었다. 아사히가 이런 맛이었던가.
욱 하고 올라왔던 갑갑함이 어디로 사라지고 알딸딸한 기운과 함께 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 세상 뭐 있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던 원망이 맥주의 청량감과 함께 내려앉았다. 술김에 안주를 이것저것 꺼냈다. 그동안 참아왔던 군것질 거리 이 참에 실컷 먹어보리라 싶었나 보다. 캔에 들어있던 400g의 종합 견과류가 쌉싸름한 맥주와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자꾸 손이 가는 바람에 견과류 깡통도 맥주 깡통도 금세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남은 안주를 처치하기 위해 맥주 한 캔을 더 꺼내 들건 뭐람. 이건 남은 반찬 다 먹어치우겠다고 밥 한 그릇 더 먹는 거랑 이치가 같다. 아사히의 톡 쏘는 맛을 재차 확인해 보겠다고 맥주 한 캔을 더 꺼내 들었다. 스트레스 만땅으로 시작한 맥주는 혼술이었지만 좋아하는 드라마와 함께 하니 어느새 흥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 캔째 들어서서는 드라마 내용 앞부분이 기억 안 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인생무상이 되어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며칠 뒤 훅 늘어난 몸무게를 확인했다. 그날 안주까지 합쳐 밥 다섯 그릇 이상의 칼로리를 단시간에 처리한 것이다. 맥주 탓이라고 그날 욱 하는 마음을 눌렀어야 했다며 늘어진 옆구리살과 뱃살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아휴~좀 참을 걸.
맥주 세 캔의 결과물은 일주일 내내 땀으로 흠뻑 젖는 운동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달밤에 계단 오르기부터 홈트까지 땀을 낸 것이 맥주 한 캔만큼은 될 터인데 아직 두 캔 몫의 땀을 더 흘려야 다시 제자리로 찾아갈 건지.
그렇다고 맥주를 다신 입에 안 대겠다는 맹세 같은 걸 할 마음도 자신도 전혀 없다. 요즘 무알콜이니 저칼로리니 다양한 맥주가 나왔다지만 난 한 잔을 마셔도 톡 쏘는 알싸하고 쌉쌀한 맛이 혀에 촥 감기는 정통 맥주를 선택할 거다.
내 최후의 결정은... 맥주를 맘껏 마시기 위해 더 극한 운동을 하겠다는 각오, 다짐?
딱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