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을 붙들고.
11월도 벌써 중순이 지났다. 점점 깊어져 가는 가을도 이번 주를 끝으로 막을 내릴 듯하다. 알록달록 색색으로 물들어 있는 단풍은 초록이 보통 값인 나무의 화려한 외출 같은 느낌이다. 노랑, 빨강, 갈색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지만 그 세 가지 색들이 다양한 명도와 채도를 가지고 각각 자신만의 옷차림을 뽐내며 각기 다른 색을 구현해 낸다. 색채를 실현해 내는 기술이 눈에 띄게 발달한 현재에도 그 색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재현해 낼 순 없을 것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올 해의 가을 색을 영원히 남겨보려 하지만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은 모두 한결같다. “눈에 보이는 것만큼 사진이 예쁘게 안 나오네.” 나 또한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포기하고 두 눈으로 지긋이 단풍과 낙엽의 축제를 눈과 머리에 담아보려 애쓴다.
나무들은 이번 주까지의 화려한 축제가 끝나면 다음 파티의 단장을 위해 잠시 몸을 웅크리고 충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찬란하게 이별을 고하며.
엊그제 다녀온 융·건릉은 수많은 나무들의 단풍과 낙엽으로 풍성했다. 가을이란 가을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거리의 낙엽들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듯 길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는 것과 달리 융·건릉의 낙엽들은 내려앉은 그 자리에서 바닥에 오롯이 누워있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수많은 인파의 발길이 그 위를 지나가도 도시 거리에 쌓여있는 낙엽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색상과 형태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낙엽 위를 거닐던 중 문득 그의 말이 떠올랐다.
같은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그는 부쩍 피곤한 얼굴로 수업에 나타나는 날이 최근에 늘었다. 반 친구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그는 “가을을 탑니다”라는 말로 간단하게 이유를 설명하곤 입을 닫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그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무심한 듯 툭! 내뱉은 그의 한마디에는 이별, 아픔, 술의 위로, 잠시의 방황 같은 그런 향취가 났다. 그 말이 마음속으로 굴러들어 온 건 나도 가을만 되면 어쩔 줄 몰랐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연인과의 이별이나 가슴 시린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때 가을만 되면 거리로 공원으로 산으로 매일 나갔다. 나가지 않고서는 들썩거리는 마음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을 퍼붓고 가을바람과 정면으로 싸우며 밤길을 많이도 걸었다. 기온의 변화 때문인지 나무들이 뿜어내는 색채의 마술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쓸쓸함에 가슴이 서늘한 거였을 수도 있겠다.
사라져 가는 것을 애타게 붙들고 싶은 마음. 짧디 짧은 가을이라는 생애를.
가을은 교실 한 구석에 우수에 찬 얼굴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아이 같다. 말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우습거나 쉬워 보이지 않는 아이.
반면 입을 열면 단 한마디에도 강인함이 배어 나오는, 조용하고 뚜렷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는 아이.
여럿이 우르르 몰려가 웃음을 입에 걸고 만끽하는 것이 봄이라면.
따스한 햇볕아래에 사랑받고 자란 존재 같은 느낌이 봄이라면.
가을은 차가운 회색빛 어스름한 저녁에 홀로 서있는 달빛처럼 외로워 보인다.
왠지 혼자 길을 걸으며 보아야 그 빛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처연한 존재.
그것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그만의 속삭임이 있다.
그래서 조용히 귀 기울여야 한다. 가을이 뿜어내는 이별의 단어를 확실히 들으려면.
외로움이 익숙해 툭! 하고 뱉어버리는 냉정한 이별을 놓치지 않으려면.
언제부터 가을을 타지 않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힘들어하지 않고 가을바람을 맞으며 단풍과 낙엽을 가벼운 탄성만으로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느닷없이 뛰쳐나가 가을바람과 싸우느라 더 이상 밤길을 걷지 않게 되었다. 반복되는 이별이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가을이 보내는 이별의 메시지를 잘 듣게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의 변화가 쓸쓸하지 않다.
이젠 그렇게 섬세하게 느끼고 아파할 감성과 에너지가 줄어들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마치 가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