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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어리랏다 Mar 26. 2022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삶

상대가 아닌 나에게 외치는 말이었다.

1. 

내 나이 스물여덟 살, 늦깎이 복학생으로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중 수업시간에서 만난 새내기. 나와 여덟 살 차이 나는 그 아이는 누구보다 나를 편하게 대해주었다. 내가 신입생 때 나보다 학번이 높은 사람들은 아예 생각 자체를 별로 안 했기에 먼저 다가와 주는 그 친구가 한 편으로는 고맙고 더 많은 걸 주고 싶기도 해서 졸업하고 난 뒤에도 간간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했다. 나도 나름대로 사회초년생으로 허우적거리다 보니, 그 아이가 군대 갈 때 한번 연락하고 이후에는 거의 연락하지 못했는데, 정말 우연한 기회로 그 아이가 전역할 때 즈음 다시 연락이 닿았다. 마침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다고 하는 그 아이와 약속을 잡았다. 



2. 

여전히 순진한 얼굴로 방실방실 웃는 대학생을 보니, 순간 내가 더 늙어 보였다. 약간은 어색하다며 말이 점점 많아지는 그 아이 앞에서, 나도 조금 편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었고 알고 지낸 이후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다. (학생 때의 나는 8살 차이 나는 스무 살 아이와 술을 먹는다는 것이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아이는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야기했다. 



3.

자신이 대학에 들어간 이후 더 잦아진 부모님 간의 싸움.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떳떳하고 싶은데 자신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에서 오는 좌절감. 군입대 하기 전 망쳐놓은 학점과 그로 인한 죄책감. 성공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말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 그 아이는 나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치열하게 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그래서 최선을 다해 고민하다 내렸다는 결정은 공무원. 앞서 말한 목표와 너무 동 떨어진 느낌이라 그 이유를 물어보니, 일단 공무원이 되어 안전한 보험을 들어놓고 도전을 하고 싶다고 한다.



4. 

"그럴 수 있지"

내 앞에서 나이 많다고 으스대는 사람들을 정말 온 힘을 다해 저주했던 사람으로서, 나는 그 아이에게 나의 얄팍한 훈계를 늘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해도 안 듣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 아이가 살아온 환경을 모두 알지 못한다. 누구와 관계를 쌓아가며 오늘의 모습을 만들었는지 자세히 알 수도 없다. 수많은 별 같은 경험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우주를 내가 어떻게 감히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공무원이 되겠다는 목표가 어때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실제 이룬 것 하나 없는 프로불평러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한다.



5.

하지만 대화 중 "제가 다른 걸 도전하기 무섭나 봐요"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말들 속에서 그 아이가 스스로가 선택한 길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강한 급발진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아이를 다그쳤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한 급발진은 지나치게 많은 나에 관한 정보의 유출이다. 술도 좀 들어갔겠다, 앞에 있는 아이는 여전히 내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을 유지하고 있겠다, 이 때다 싶어 득달같이 내 생각을 쏟아버렸다.



6. 

부모님과 사이는 좋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좋다고 말했다. 나는 학창 시절 부모님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다 말해주었다. 등록금을 포함하여 부모님에게 돈을 받아 쓰는 것이 부끄럽다는 그 아이에게 그러면 경제적 독립을 위해 어떤 것들을 하고 있냐 물었고, 그 아이는 군대에서 모은 돈 말고 지금 따로 하고 있는 것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나는 없는 형편, 좋지도 않은 사이에 돈 달라는 소리가 하기 싫어 학교 다니며 평일 4시간 자며 4개의 일을 했다 말했다. 그 아이를 혼내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나는 그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활로를 찾아보려 했었다는 식으로 공유해주었는데 '없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남들에게는 정말 커다란 축복일 수도 있다'라는 말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 아이가 놓인 현실은 물론 가혹하지만 그 안에서 분명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스스로가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또 다른 이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환경일 수도 있음을 온전히 전달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그 나이대에 겪었던 일들, 그 당시 했던 고민들을 공유했다.



7.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인생에 있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부분과 신조 등을 나누다가 갑자기 울컥했다. 너무나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던 그 아이의 눈빛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먹는 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조언이랍시고 하는 말들이 왠지 모르게 나에게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삶이란, 본인 스스로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과정이야. 매 순간 내가 스스로 하는 선택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에게는 그 선택이 맞았음을 증명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는 게 너무 재밌는 거야. 내 모든 선택과 그에 따른 순간들이 나의 삶을 증명하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과거 내가 했던 선택들에 대해 아쉬움은 있을지라도 후회는 없어. 그때의 내가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 믿거든. 나는 그때의 나를 응원할래. 그리고 난 내가 가게 될 내 인생의 방향이 맞고 내가 너무 행복하게 잘 살 거라는 걸 믿어"


그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말. 항상 웃기만 했기에 몰랐던 그 아이의 눈물을 보며 나도 목소리가 떨리고 코끝이 찡해졌다. 너가 선택했으면 확실히 믿고 쭉 밀고 나가라고. 어떤 선택을 하던 나는 무조건적인 너 편 돼주겠다는 말과 함께 나 또한 내 삶으로 너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갖고 있는 것이 너보다 더 없었던 사람이 잘 사는 모습을, 매번 성장하는 모습을 내 삶을 통해 너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8.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삶. 그 증명이 어떤 것을 대상으로 어떤 결과로써 증명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의 선택과 경험에 대한 확신과 감사함이 있다면, 적어도 지나온 발걸음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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