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경전인 성경 잠언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사람에 따라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에게 이 성구는 쉽게 납득하긴 어려웠다. 마치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어떤 존재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같지 않은가. 이 말을 들으면 목표를 위해 시간과 집중력을 투자했던 나의 노력이 헛되게 느껴진다. 나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말이다.
최근에 읽은 류시화 시인의 에세이 제목을 보자마자 저 성구가 바로 생각났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니. 스스로 생각한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주변에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살아가기엔 우리의 인생에 변수가 너무나도 많다. 제목부터 친밀감이 생긴 덕분에 그의 말 하나하나에 내 상황과 감정이 쉽게 이입되었다. 공감되는 수많은 말들 중에 몇 가지를 골라 소개를 해보려고 한다.
내 직장의 옆자리에 계신 계장님은 싫어하는 게 굉장히 많으신 분이다. 손님이 사 오신 간식거리를 사무실에 계시는 분들과 나누고 있을 때 슬쩍 다가오셔서 본인이 싫어하는 음식이라면서 고개를 홱 돌려 가버리신다. 회식자리에서도 분위기 지루한 게 싫다면서 모임 중간에 슬쩍 자리를 떠나 집에 가기도 하신다. '난 이거 싫은데'라는 말을 하루에 한 번씩은 듣는 덕분에 이분이 싫어하는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류시화는 책 속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할지, 싫어하는 것이 많은 사람으로 각인될지 말이다. 계장님을 생각하면 싫어하는 게 많아서 무언가를 해드리기도, 같이 일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이것도 싫어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 좋은 마음으로 행하려는 것도 멈칫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자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엮여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듣는 것도 힘들지만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친구 중에 감정기복이 심하고 자신을 못나게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생각이 많아지면 안 좋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피어나 우울해질 때도 있고, 집에서 편히 쉬다가 씻지 않고 만나는 것에 대한 민망함에 스스로를 못났다며 책망하는 친구. 하지만 나는 그 친구가 '우울한 친구' 혹은 '자기 관리 안 하는 친구'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특정한 시점의 지나가는 한 순간에 모습일 뿐이다.
우울감은 가랑비 젖듯이 마음을 갉아먹는다.
안 좋은 생각이 많아지면 나 또한 마음이 딱딱해져서 본심과는 달리 거친 표현들이 나오고 할 일들을 미루면서 계획을 지키지 않은 스스로를 좋게 보지 않을 때도 있다. 한 때 이런 내 모습을 하나씩 사진으로 찍어 마음속 전시회까지 열기도 했다. 사진 하나에 감정이 깊게 이입되어 '나는 왜 이런 사람인 걸까' 한숨 쉬며 우울감에 젖어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정말 쓸모없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라도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닉 트렌턴의『생각 중독』이라는 책에서도 상황을 보는 방식을 바꾸면 감정도 바뀐다고 했다.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불행한 인간이 아니라 불행한 순간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그 순간이 우리를 어떤 존재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 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 자신은 그 강물에 발을 담그고 그대로 서 있을 뿐이다.
작년의 한 후배의 만남도 생각난다. 2~3년 만에 얼굴을 제대로 보고 만난 친구였는데 헤어지기 전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저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형이 제 얘기를 많이 들어줬었던 거 기억하세요? 다른 사람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주고 싶어서 여러 방안을 제시해 주고 도움이 되는 말들을 많이 해줬거든요. 그런 사람들도 고맙긴 했지만 저는 조언보다 공감을 바랐던 것 같아요. 형은 답을 주진 않았지만 제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준 덕분에 제가 끝까지 거기서 일 할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이 말에 굉장히 당황했다. 그때의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묵묵히 듣고 있었던 건 후배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잘 듣기'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후배의 이야기를 듣긴 했다. 그런데 그게 큰 도움이 되어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해 주다니. 당시에는 민망하게 웃으면서 지금 잘됐으니 된 거라고 넘겼지만 이게 류시화가 말한 '섣불리 조언하거나 어리석음을 지적함 없이 끝까지 들어주는 일의 힘'인가 싶었다. 똑같이 사람에게 시달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힘들어하고 어떤 사람은 무례한 민원인 때문에 힘들어한다. 누구나 사회에서 일하면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거 아니냐며 나도 그 마음 다 안다는 식으로 넘겨짚는 대화는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어주질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편의 글마다 류시화가 만나고 경험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의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나를 몰래 관찰했나 싶을 정도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머리가 쭈뼛 서는 글도 있었다. 다행히 류시화가 여행을 통해 깨닫고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도 많이 바뀐 것 같아서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과거의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삐뚤었고 스스로가 만든 오해에 갇혀 힘든 시기를 많이 보냈다. 이 시기를 거울삼아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요즘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처음에 이야기한 잠언 내용도 어찌 보면 선후관계를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 싶다. 신이 있다는 가정 하에, 신은 우리에게 힘든 일들을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고 거기서 얻은 깨달음으로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만든다고 했다. 잠언의 내용도 다시 보면 신은 인도할 뿐이지 계획해주지는 않는다. 남이 만든 계획 속에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더 알아가고 능동적으로 결정해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상황은 신이 만들겠지만 결정은 결국 내가 한다.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말처럼,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회가 되는 것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책은 내가 노력하는 것이 헛됨이 아님을, 나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