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2.
3년 전, 종수가 하고 있던 많은 업무 중 하나가 병원에서 사용하는 약재와 판매되는 예제제의 재고를 관리하는 업무였다. 하루에도 수십 kg의 약재들을 사용하고 효능이 좋기로 소문난 예제제는 순식간에 나가기 때문에 하루라도 관리를 안 하면 재고가 없어서 약을 판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병원 홍보를 위해 유명 인사분들에게 내어지는 예제제들도 꽤 있어서 종수는 재고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을 고심했다.
나름대로 관리를 하던 중 한 예제제 재고가 전산과 맞지 않는 사고가 일어났다. 한두 개도 아니고 열몇 개가 차이가 나서 종수는 패닉에 빠졌다.
'재고가 갑자기 이렇게 안 맞는 경우가 이때까지 있었던가...?'
어느 시점부터 차이가 났는지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한 달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라 재고관리에 허점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종수의 부서를 맡고 있던 과장은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고받은 즉시 어떻게 된 일인지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면서 창고를 뒤엎다시피 하면서 전체적인 재고를 파악하게 했다. 그것까지는 종수도 자신의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면밀히 살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누군가가 전산 재고를 임의로 건드렸다는 사실을 프로그램 관리자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종수는 이제야 범인을 알게 되어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런데 전산 재고를 건드리를 권한은 같은 부서사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도로 불안해졌다. 혹시라도 내부에서 약을 빼돌린 건 아닌가? 온갖 상상을 하던 중에 과장의 핸드폰으로 프로그램 관리자가 연락이 왔다. 전산 재고를 수정한 사람의 전산 ID를 찾았다고 했다. 과장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전화 소리를 스피커로 전환했다. 종수는 입이 마르기 시작했다.
"전산 재고를 임의로 수정한 ID가 배정된 사람이 누굽니까?"
"네. 이름이... 임종수, 임종수라고 하네요."
자신의 이름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순간, 종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내 ID로 수정이 되었다니?'
종수는 굉장히 당황했지만 그런 적이 있었나 기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으니 머릿속을 뒤져도 나올 것이 없었다. 과장도 당황했다. 종수가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산이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두 번 세 번 물어봐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임을 뻔했다. 과장은 재고관리는 자신의 업무가 아니었다며 선을 그었고 같이 일하던 분들은 종수의 이름이 나오자 그럴 리 없다면서도 본인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마자 이 일에 신경을 끄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애초부터 이 사건이 벌어진 직후 어떻게 된 일인지 도와주려는 움직임조차 없었다. 종수만 발을 동동 구르며 땀나게 뛰어다녔다. 종수가 벌인 일이 아니라는 것이 완벽히 증명되지도 않았고 증명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재고 관리를 제대로 못한 직원'으로 낙인찍힐 뿐이었다.
"종수 씨, 저번에 약 없어진 거 말이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가져간 것 같더라고... 허허. 뭐, 이제 알았으면 되지 않아? 병원 좋자고 한 일이었는데 말이야. 안 그래? "
정미 과장이 급하다는 핑계로 말도 없이 예제제를 가져가서 재고가 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정상적인 절차라면 종수가 있던 부서에 얘기하고 신청서를 작성한 후, 눈으로 재고를 확인한 뒤에 가져가야 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손님이 방문했고 약을 선물하려고 예제제 창고에 왔는데 하필 그때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정미 과장은 병원에서 일한지 30여년 되었기 때문에 병원 내 잠금장치 번호에 대해서는 다 꿰고 있었다. 그래서 잠겨 있던 부서 창고를 열고 약을 먼저 가져가면서 평소 종수 ID로 관리하고 있는 전산 프로그램에서 출고 처리를 하고 나중에 신청서를 작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본인이 한 일을 잊어버려 민망해하면서 웃는 정미 과장의 얼굴을 종수는 마냥 웃으면서 대응할 수 없었다. 종수는 희미한 미소를 겨우 짓고는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정미 과장은 계획적으로 일하는 종수와는 업무 스타일이 상극이었다. 대외적으로 다른 기관 사람들과 일하는 정미 과장은 성격이 시원시원했지만 다르게 이야기하면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이 부분 때문에 종수가 불편해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서가 바뀌었어도 마찬가지었다. 직속상사는 아니지만 총무과에 옮기고 나서는 타 부서와 함께 일해야 하는 일정들이 자주 있어서 부딪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종수 씨, 내일 오전 9시에 학교 본관 올라가서 홍보활동 할 거 있거든? 물품 나르고 자리 지켜야 하니까 시간 비워놔."
"네? 내일 그 시간에 할 업무가 있는데요?"
"안되는데? 그때 종수 씨 밖에 갈 사람이 없어. 업무를 미룰 순 없는 거야?"
"과장님, 바로 내일 일정을 오늘 갑자기 이야기하시면 곤란합니다. 일단 제가 일정이 되는지 알아보고 조율을 먼저 해주셨어야죠."
"그래서 오늘 이야기 한 거잖아. 아 몰라, 시간 최대한 만들어 놔, 알았지?"
이런 대화를 수 없이 반복하다 보니 갈등을 싫어하는 종수 성격상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일을 미루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종수가 일정이 도저히 안돼서 처음 일을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정미 과장은 '내가 하라는 일을 거절해?'라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10분에 한 번씩 사무실을 찾아봐 왜 시간이 안되는지 이야기해 보라면서 종수를 다그쳤다. 이유를 설명해도 거절은 거절한다는 태도로 돌진하니 종수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 욱하는 마음을 다잡고 정미 과장이 지시한 일을 해야 했다. 앞서 말한 재고사건과 더불어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니 종수는 정미 과장에서 좋은 감정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었다.
그런 정미 과장은 현정에게도 불편한 경험을 선사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현정은 다른 직원분들을 부르는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자주 쓰곤 했다. 바쁘다 보면 정신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종수도 가끔은 잘못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정미 과장에게는 심각하게 불쾌했던 것 같았다. 어느 날, 복도에서 마주친 정미 과장에게 밝게 인사하던 현정은 지금도 그날의 일을 잊기 힘들다고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점심은 맛있게 드셨어요?"
"잠깐만, 선생님? 현정 씨는 내가 선생님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과장, 계장 잘만 이야기하면서 나는 왜 선생님이야? 나 무시해 지금?"
"죄송해요, 과장님! 제가 아직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조심할게요!"
"선생님이라 하는 거 한 두 번 들은 게 아니야! 언제까지 그러려고 하는 거야? 어이가 없네."
"아니예요, 과장님! 저 과장님 얼굴 뵙고 인사하는게 이번이 처음인걸요..."
눈물 날 뻔할 정도로 호되게 혼난 현정은 억울한 감정이 컸지만 병원에서 열심히 해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어느 여름날, 자신의 부서에 방문한 정미 과장이 더울까 봐 에어컨도 틀고 시원한 아이스티도 준비했는데 정미 과장은 현정을 거뜰떠보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현정 씨, 나 지금 현정 씨 이러는거 너무 부담돼. 지금 목 아파서 냉기 쐬면 안되니까 에어컨은 끄고 아이스티도 현정 씨가 알아서 마셔."
그 일 이후에 현정은 정미 과장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친해지는 건 어렵지만 미움받는 건 한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