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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피 Aug 13. 2023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살기 위해 소소한 행복을 찾기로 했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에서, YOLO (욜로, you only live once) 족을 지나 요즘은 FIRE (파이어, Financially Independent, Retire Early) 족이 유행이다. 당장의 행복이나 만족감보다는 현재를 희생해 빠른 경제적 자유와 편안한 노후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진 모양이다. 나는 한때 파이어족을 꿈꾸었지만, 지금은 반대로 소확행을 즐기며 욜로족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치과의사는 호주에서 통계적 자살률 1~2위를 오랜 세월 굳건히(?) 지키고 있는 직업이다. 멜버른 모나시대학의 2023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 정신적 건강 문제로 자살을 생각한 치과의사는 여섯 명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매년 많은 치과의사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리포트의 결과가 놀랍지는 않다. 소위 말하는 번아웃이 빨리 오는 직종이라는 것도 공감한다. 다양한 (아픈)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것 외에도, 예민하고 완벽주의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는 점, 세밀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 한껏 웅크린 자세로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점, 내가 한 치료의 값어치를 매 순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번아웃이 오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적 압박이 주는 심리적 갈등이 아닐까 싶다.


  일반적으로 환자가 한 명 들어올 때마다 짧게는 15분, 길게는 1시간 반가량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때마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한 혼자만의 고독한 레이스를 시작한다. 정교함을 놓치지 않으면서 환자의 상태를 살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준비 시작. 심장을 쪼였다 풀기를 열 번쯤 반복하고 나면 휴식, 또 열 번쯤 반복하고 나면 퇴근. 드디어 끝. 이것이 굉장한 정신적 피로를 준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쉬는 날이면 시간에 맞춰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엔 멍 때리는 시간까지도 계산된 계획하에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직업병이다.


 살기 위해 소소한 행복을 찾기로 했다. 정신 의학박사 한 분이 이야기하길 행복은 크기가 아닌 빈도라고 한다. 우리는 매 순간 큰 행복을 좇지만, 매일을 살게 하는 것은 일상 속 작은 기쁨이다. 추상적인 미래의 행복보다는 오늘, 당장, 지금, 이 순간, 롸잇나우 느낄 수 있는 만족감과 성취감, 뿌듯함과 안도감, 편안함과 즐거움에 집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떠올려 봤다. 


  이사 오면서 마루 칠을 다시 했는데, 의자 바닥에 긁혀 흠집이 나는 것이 거슬렸다. 다리 밑에 붙여둔 보호 스티커가 계속 떨어져, 은근한 스트레스를 받던 참이었다. 폭풍 검색 후 실리콘 커버를 사서 씌우자 속이 후련하다. 도파민 지수가 올라감이 느껴진다. 이토록 간단하다니. 싱크대의 수세미 거치대 역시 소소한 행복이다. 질펀한 스펀지를 개수대 바닥에 내려놓지 않아도 되어 위생적이다. 


  후각에 예민한 나를 위해 캔들워머도 샀다. 향초를 태우는 대신 할로겐 열로 초를 서서히 녹이는 방법인데, 은은한 향기가 집안 가득 퍼지는 것이 너무 좋다. 깜빡하고 끄지 않아도 불이 날 염려가 없어 더욱 만족하는 중이다. 리테일 테라피는 역시 배신하지 않는다.


  소비 지향적인 행복에 머물지 않도록 글 쓰는 일도 다시 시작했다. 대부분이 ‘안물안궁’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함) 한 경험담과 사색이지만 개인적인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행동과 감정의 이유를 고민하다 보면 많은 일들이 객관화된다. 무엇보다 글로 써 내려가다 보면 고민이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쓰다 보니 해결되었다고 느낄 때가 많은 것을 보면 답이 없어 보이는 고민은 구체화가 답인가 보다. 언어로 구체화되어 파악되는 순간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번아웃이 왔을 때를 떠올리면, 반복되는 인풋에 너무 많은 것들이 몸과 맘에 쌓여 있기만 했다. 의미 있는 아웃풋을 내는 법을 알았다면 자신을 궁지로 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미 있는 아웃풋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성찰을 통해 인풋이 재해석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마음의 여유가 부족할 때는 인풋을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은 마음에 작은 여유를 가져다준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시킨 후 재생산하도록 돕는다. 소확행이 필요한 이유이다.


  지치고 힘든 하루였다 느껴질 때면, 오늘의 소소한 행복은 뭐였는지 생각한다. 떠오르지 않는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향초를 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조금 늦게 파이어족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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