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라 단편소설>
<진짜 젊어지게 해드립니다. 사기 아님.>
<010-XXXX-0000>
한 때 이런 명함이 동서울 터미널 일대에 휘날렸다.
노란색 바탕에 궁서체로 쓰인 저렴한 아트지 명함은 누가 봐도 “나 사기요”하고 외치는 듯 했다. 아니면 돈 많고 시간 많은 멍청이가 뿌린 실없는 장난이거나.
사람들은 대부분 무시하고 지나갔으나 간간히 눈치를 보며 호주머니에 명함을 넣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변 일대를 뒤덮었던 명함은 일주일 쯤 지나자 자취를 감췄다.
"건배!!"
맥주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호프 집에 울려퍼졌다.
<자라고등학교 42기 동창회>
동창 회장인 정수는 머리에 젤을 떡칠하고 한 껏 멋을 부리고 왔다.
뭐, 앞머리가 훤히 까져서 몇 개 남지도 않은 머리털을 세워봤자라서 별다른 멋은 없었다.
아니면 56살에 벌써 머리가 하얗게 샌 영철이보다는 낫나.
"어 왔냐, 황개. 배가 더 커졌다?"
영철이 자리에 앉는 나를 보고 인사했다.
"어, 할배. 검은 머리 파뿌리 다 됐네?"
나도 반갑게 인사했다.
황개는 내 별명이다. 초고속 승진으로 30대에 과장을 단 나의 전리품은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배였다. 배를 쿠션 대용으로 쓰기 시작한 40줄 부터 나의 별명은 황소 개구리였다. 줄여서 황개.
저마다 연봉 자랑, 부동산 자랑, 자식 자랑하기 바쁜 초, 중학교 동창회와 다르게 이 녀석들은 당최 자기 자랑 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주제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바로 젊음과 노화. 100세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50대면 노화의 풍파를 맞기 시작할 때였다. 몇몇 여자애들은 보톡스니 필러니 하는 피부과 시술을 맞아가며 주름을 최대한 잡아끌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은 듯 했다.
대부분은 50대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니가 이러니 내가 저러니 하지만 다들 고만고만했다. 특별히 늙은 사람도 특별히 젊은 사람도 없는 그런 아줌마 아저씨 집단. 어쩌면 가장 아래에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에 평화를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조일원.
일원이는 어릴 때부터 못생겼다. 정확히는 엄청난 노안이었다. 날 때부터 그렇진 않았겠지만, 중학교 때 2차 성징을 잘못 겪어 그렇게 되었단다. 가끔 껄렁한 옆 반 일진들이 찾아와 편의점에서 담배를 뚫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외모는 순전한 운이었다. 옆 반도 모자라 옆 학교에서 찾아올 정도의 미남이었던 성주는 아직도 잘생겼다. 물론 그도 노화는 빗겨가지 못했다. 그럼 뭐하나. 눈가 주름과 팔자 주름이 얼굴 위에 얹어졌지만 그래도 그는 잘생겼다. 천문학과 교수랬나, 분명 아직도 학교에서 인기가 많을 것이다. 잘생겼다는 칭찬을 할 때마다 성주는 손사래를 쳤지만 아직도 여자들은 테니스로 단련된 그의 전완근을 슬쩍슬쩍 쳐다보곤 했다.
하지만 그 날의 주인공은 성주가 아니였다. 머리가 손에 꼽을 만큼도 안 남은 정수의 빛나는 머리도 아니었다. 필러 부작용으로 짝짝이가 된 재희의 이마도 아니었다.
"늦어서 미안해~"
바로 일원이었다.
영철이는 일원이에게 우리 테이블로 오라고 하려다가 갑자기 얼었다. 영철이의 엉덩짝을 때려도 반응이 없었다.
"야, 할배"
그는 말없이 호프집 문을 가리켰다.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서있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일원이 특유의 걸걸한 바리톤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어렸을 때 노안인 사람은 나이를 들면 그대로 늙는다더니 그런건가? 아니다. 일원이는 지난 동창회에서도 최고의 노안 상을 수상했다.
모두가 일원이를 보고 굳었다. 성형을 한 걸까? 피부과에 돈을 쳐 부은 걸까? 악마랑 계약이라도 한 걸까?
아니, 그랬으면 잘생긴 외모로 했겠지. 일원이는 고등학생 때 얼굴 그대로였다. 눈가 주름도 없고 팔자 주름도 없는 30대 같은 노안. 하지만 우리 중에서는 가장 젊어보였다. 심지어는 성주만큼 매력적이었다.
그 날의 주인공은 단연 일원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일원이 주변을 에워싸며 비법을 물었다. 심지어는 성주도 다가 와 샐쭉 입을 내밀며 알려달라고 했다. 일원이는 기분이 좋았는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대전 출장 갔다올 일이 있어서 버스를 탔거든? 알다시피 내가 강동구 살잖냐. 그래서 동서울 터미널로 가서 내렸지. 근데 갑자기 그 순간 엄청난 신호가 오는 거야. 그래서 화장실로 달려갔지. 화장실에서 열심히 힘들 주고 있는데-"
정수는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옆구리를 찔렀다.
"아야야- 알았어! 거기서 어떤 명함을 발견했거든? 노란색 바탕에 검은 글씨. <진짜 젊어지게 해드립니다>라고 써있더라고. 이게 뭔 소린가 했지. 근데 거기 전화번호가 써 있다?"
"어, 나도 그 명함 본 적 있어" 할배가 말을 보탰다.
여기 저기서 나도, 나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첨엔 그냥 장난인 줄 알았지. 일단 집에 가야하니까 지갑에 명함을 넣고 잊어버렸어. 그러고 어느 날 야근을 하고 밤에 들어오는데 와이프가 내 얼굴을 보고 소리를 지르더라고. 하.. 미안하다고 하긴 했는데.."
일원이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 날 밤 소파에서 훌쩍거리다가 갑자기 그 명함이 생각났어. 그리고 전화를 걸었지. 진짜 받을 줄 몰랐는데..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가서 시키는 대로 하면 젊어지게 해준다는 거야? 혹시 장기 털리는가 걱정했는데.. 휴.."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성주가 재촉했다.
"그게.." 일원이 뜸을 들이자 이번에는 재희가 등짝을 때렸다.
"아씨-, 그 이후는 말하면 안 된다고 했단 말야!! 그러면 다시 원래 나이로 돌아온다고 했다고. 어쨌든 가면 뭐.. 뭘 시키는데 이상한 건 아냐. 아니, 이상한 건가? 하여튼 나쁜 건 안 시켜. 정말 궁금하면 한 번 가봐."
일원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분명 몇 달 전 동서울 터미널에서 봤던 그 명함이다.
아이들은 반신반의했다. 사진을 찍어가는 애도 있었고 어이 없어 하면서 일원이의 뒷통수를 한 대 치는 애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일원이의 이야기에 솔깃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주머니에 명함을 다시 넣을 때까지 아닌 척하며 쳐다보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지하철 4호선 막차를 타고 당고개역에서 내렸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스산했다. 밤공기에 몸이 으슬으슬해 팔을 연신 쓸어내리며 골목길 사이를 걸었다. 10분 정도를 걷다가 한 골목을 더 돌자 건물 한 채가 보였다.아, 이 건물인가? 스마트폰 메모장을 꺼내서 글씨를 최대한으로 확대했다. 안경을 눈 위로 슬쩍 들어올리고 눈을 찌푸리며 보니 이 근처가 맞았다.
끽, 끽, 끼이익-
문이 뻑뻑한 탓에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열었다. 낡아빠진 건물이라 그런지 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것이 신기했다. 오래된 아파트 처럼 생긴 건물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지하 3층으로 오랬는데..”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둘러봐도 지하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 건물이 아닌가 싶어 나가려는 순간, 노란색 명함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이 건물이 맞나보다.
그렇다면 갈 길은 하나. 나는 긴장하며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그럼 그렇지, 엘리베이터 벽면에는 떡하니 지하 3층이라는 버튼 하나만 달려있었다.
지하 3층에는 레트로한 꽃 무늬로 꾸며진 문이 있었다. 위에는 <진.젊.사 스튜디오>라고 쓰여있었다. 설마 명함의 저 문구가 이름이었다니. 스튜디오라는 곳의 이미지는 건물 생김새와 딴 판이었다. 사방에 방송용 카메라와 조명이 놓여 있었다. 구조는 아침마당 스튜디오 같았고 온통 노란색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진짜 젊어지게 해드립니다, 사기 아~님! 허허허”
노란색 베레모와 셔츠, 검은색 멜빵바지를 입은 털복숭이 아저씨가 너털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앞머리가 어찌나 긴지 눈을 덮을 정도였다.
“예..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하자 그는 다짜고짜 종이와 펜 하나를 내밀었다. 종이 상단에는 <스튜디오 이용 계약서>라고 쓰여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비밀스러운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용 계약서를 받고 있습니다. 하하"
나는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에 적힌 계약 내용은 간단했다.
매 게임에서 이길 때마다 베팅 액수만큼 '회춘'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질 때 마다 '노화'가 이루어진다.
본 스튜디오에서 일어난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 발설할 경우, 본 스튜디오에서 일어난 '연령 조정'이 리셋될 수 있다.
본 스튜디오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임을 통해 회춘을 할 수 있다는 의미 같았다. 노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 두려웠지만 게임을 듣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베팅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서명을 하고 종이를 건네자 그는 나를 무대 뒤 대기실로 이끌었다.
대기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정수도 있었다.
"어? 너 이자ㅅ - "
정수와 눈을 마주쳤으나 말을 걸 새도 없이 털보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저희 <진.젊.사 스튜디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서로를 상대로 게임을 진행하게 됩니다. 계약서에 적힌 대로 이길 때마다 회춘을 할 수 있고, 질 때마다 노화가 이루어집니다. 베팅 금액은 여러분의 나이입니다. 나이를 많이 베팅하면 그만큼 젊어질 수도, 늙을 수도 있는 것이죠.
단, 이 모든 과정은 생중계로 스튜디오의 고객들에게 방영됩니다. 저희 스튜디오는 그 분들의 수신료로 운영이 되거든요. 회춘 작업을 위한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럼 게임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후에 스튜디오를 나가시는 분은 모든 기억이 지워집니다. 게임에 참여하지 않으실 분은 지금 말씀해주세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저.. 포기하려는 건 아닌데 질문이 있습니다. 그 '고객들'이라는 건 도대체 누구인가요?"
털보는 말 없이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천장이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하늘'이었다.
정수를 힐긋 쳐다보았다. 천장 불빛에 빈 정수리가 빛나는 만큼 눈빛도 빛나고 있었다.
털보의 설명은 전부 터무니 없는 소리 뿐이었지만 참가자들은 모두 납득한다는 둣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와 내가 일원이라는 기적을 본 것처럼 다른 이들도 지인의 변화를 보고 이 곳을 찾았으리라.
우리는 모두 증명사진을 찍은 후 각각 다른 부스로 들어가게 되었다. 정수와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참가자 간의 대화는 금지되었다.
부스의 크기는 기표소만했고, 어김없이 사방은 노란색이었다. 다만 독서실 책상처럼 작은 형광등과 책상 위에 놓인 탁상용 거울이 있었을 뿐이다. 딸래미가 한창 사춘기일 때 이 거울과 꼬리빗을 들고 다녔던 것이 생각났다. 거울 한 쪽은 틴..틴..틴투? 하여튼 그 립스틱 색의 손자국으로 가득했다.
다행히 이 거울은 앞뒤 모두 깨끗했다.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어두컴컴한 톤, 자외선에 고문당한 탄력없는 피부, 관리라곤 받아본 적 없다고 주장하는 푸석푸석한 얼굴. 이 노화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렇게 내 얼굴을 뜯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것은 세월의 바램일까, 성숙의 훈장일까.
잠시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털보가 안내 방송을 했다.
"아아-, 잠시 안내 말씀이 있겠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곧 나눠드릴 보드에 베팅하고 싶은 나이를 적습니다. 단, 상대방의 베팅 나이와 상관없이 여러 분이 각자 적으신 베팅값은 무기명으로 모두에게 공개되며 임의의 상대와 시합을 하게됩니다. 시합은 가위바위보로 진행되며 매 경기마다 매칭된 두 분이 적으신 베팅값의 평균값만큼 이긴 사람은 회춘, 진 사람은 노화를 겪게 됩니다."
가위바위보라니,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언뜻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가장 공평한 승부를 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니 경기가 시작할 때까지 이곳저곳에서 볼멘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승패의 불확실성과 결과 확인까지의 시간이 길수록 승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로또를 하는 사람들이 낮은 확률의 인생 역전에 열광하는 것처럼.
자, 이제는 머리를 굴릴 시간이다. 얼핏 보기에 매 경기에서 이길 확률을 1/2이다. 하지만 실제 가위바위보에는 '비긴다'는 경우의 수가 있으니, 매 게임을 이길 확률은 1/3이다. 내가 얻을 수 있는 나이의 기대값은 (내가 베팅한 나이) X (확률 1/3)이다. 즉, 내가 3살의 나이를 베팅했다면 나는 1살의 회춘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변수가 있다. 바로 상대방이 건 나이가 얼마일지 모른다는 것. 다시 말하면, 베팅값의 평균이 얼마가 될 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건 나이보다 상대방이 건 나이가 크다면 내가 회춘할 수 있는 나이도 늘어나는 동시에, 노화가 될 수 있는 나이도 늘어난다. 반면, 내가 큰 나이를 건다고 해도 상대방의 베팅값에 따라 회춘할 수 있는 양이 줄어들기도할 것이다.
왕년에 수학 좀 해 본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에 베팅을 위한 화이트 보드와 검은색 마카가 기표소 안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털보가 말을 이었다.
"단,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상대방과 등을 돌려 가위바위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게임 당사자들은 승패의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게임을 관람하고 싶으신 분들은 부스 밖으로 머리만 내밀어 시청하셔도 됩니다. 작성이 완료되신 분들은 방송이 시작되면 부스 밖으로 화이트 보드를 내미시면 됩니다. 게임은 선착순으로 진행되며, 1시간의 방송 시간동안 원하시는 만큼 게임에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5분의 준비 시간을 갖고 게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5분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30초 남짓 남았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어떻게 베팅하던 내가 원하는 나이를 쓰면 되는거야. 10년만 젊어지면 좋겠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10이라는 숫자를 쓰기엔 두려움이 손목을 붙잡았다. 소위 말하는 쫄리는 기분이었다. 화이트 보드에 직선, 그리고 곡선을 연이어 그었다. 내가 적은 숫자는 5였다.
"제 37회 회춘 서바이벌!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도 저희 <진.젊.사> 스튜디오에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경쾌한 시작 음악과 함께 방송이 시작되었다. 강렬한 상단 조명으로 눈이 지끈거릴 정도였다. 거대한 스크린에는 좀 전에 찍은 참가자들의 증명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방송이구나. 시작과 함께 털보의 머리 밑에는 거대한 디지털 시계가 1시간의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스 밖으로 화이트 보드를 내밀었다.
첫 타자로 나선 것은 건장해보이는 남성과 꾀죄죄한 장발을 한 마른 남성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둘 다 30대 같지만 또 얼굴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하긴, 이 스튜디오를 찾은 사람들은 모두 노화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두 사람은 무대 한 가운데에 놓인 목제 의자에 서로의 등을 맞대고 앉았다. 두 사람의 베팅값 평균은 4살이었다.
"가위바위보!"
승자는 장발의 남성이었다. 그 다음 펼쳐진 것은 기이한 광경이었다. 어떤 효과음이나 큐도 없었지만 건장한 남성의 근육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장발의 남성은 짧아진 자신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더듬거렸다. 비로소 그 남성의 얼굴이 보였는데, 생각보다 잘생긴 청년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듯이 사연이 있어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남의 사연보다는 각자의 목표가 더 시급했다.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몇 번의 라운드 끝에 돌아온 나의 첫 대전 상대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성이었다. 긴장이 된 듯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근거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우리의 베팅 평균값은 4살이었다. 여성이 들고 나온 화이트 보드에는 작게 3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가위바위보!"
부스로 돌아가자마자 첫 번째 게임에 이겼음을 확신했다. 거울을 확인 하기도 전에 말이다.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뱃살이었다. 항상 허리에 두르고 다니느라 몸을 무겁게 했던 뱃살이 줄어들었다. 물론 훨씬 젊을 적부터 모아온 뱃살이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거울을 보고 많은 변화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검버섯이 조금 줄어든 기분이 들었다. 다음 라운드에서 변화가 있는 것을 확인하려면 거울을 좀 더 꼼꼼히 봐야겠다.
두 번째 상대를 만났을 때 시계는 이미 34분을 지나 33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5살을 베팅했지만 상대는 7살을 베팅했다. 6살을 두고 한 결투의 결과도 자명했다.
"가위바위보!"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나는 허리가 좀 더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올해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짜릿한 성공이었다. 나는 부스로 달려가 거울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원래는 눈을 감고 있어도 이마에 일자 주름이 선명했는데, 이제는 눈을 떴을 때만 이마가 접혔다. 사계절 내내 부르트고 각질이 선명했던 입술에는 수분이 차올랐다. 산더미 만했던 배는 언덕 정도로 줄어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도파민의 흐름을 느꼈다.
부스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다른 참가자들의 경기를 조금 지켜보았다. 이제 스크린에 뜬 사진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스 밖으로 화이트 보드를 내미는 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회춘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서였고, 노화가 일어난 사람들은 더 큰 도박을 걸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들여다봤다. 처음 이 스튜디오에 발을 들였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젊어진 외모였다. 하지만 들여다 볼 수록 욕심이 났다. 아내는 내가 40대 후반이 되었을 때부터 침대에서 고개를 돌리고 잠을 잤다.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더 이상 내 볼에 뽀뽀를 해주지 않았다. 혹시, 아주 조금만 더 어려질 수는 없을까? 나이를 조금만 베팅하면 되지 않을까? 아주 조금만... 화이트 보드를 부스 밖으로 내밀었다. 커다랗게 쓰인 3이었다.
마지막 상대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 잘 아는 모습이었다. 정수는 거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를 보고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정수가 들고 나온 화이트보드에는 두 개의 직선이 그려져 있었다. 젠장, 베팅값이 11이었다. 손에 땀이 흘렀다. 7살이나 어려질 수 있는 기회였지만, 반대로 기껏 얻은 7살을 잃을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의자에 앉으며 정수는 작게 속삭였다.
"악감정은 없어. 알지?"
고등학교 때 다툼이 있으면 우리는 항상 가위바위보로 해결했다. 물론 심각한 다툼이랄 것 까지도 없었다. 주로 점심 축구에서 오프사이드가 있었는지, 방과 후에 피시방을 갈지 오락실을 갈지 따위의 언쟁이었다. 신기하게도 정수는 항상 나와의 가위바위보에서 승리를 취했다. 나는 불공평하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공정한 게임이었다.
이번에도 지면 어떡하지, 머릿속에서 걱정이 셔틀런을 했다. 긴장되는 순간에 털보가 외쳤다.
"가위바위보!"
이 게임의 가장 우스운 점이 뭔지 말했던가. 게임의 승패를 알려주지 않아도 신체 변화로 그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넌 항상 바위를 내더라."
정수는 비웃음이 아닌 안타까움으로 위로를 하고 부스로 돌아갔다. 머리의 빈칸이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나도 다시 무거워진 배를 끌어안고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시간은 채 5분이 되지 않았다. 좀 전부터 게임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는지 털보는 당황한 목소리로 마지막 기회를 홍보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금이 아니면 다시 회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마지막 기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원래 나이보다 3살 정도 회춘한 모습이다. 하지만 스크린에 있는 증명사진과는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정수와의 결투가 낭패였다. 조금 울고싶었다. 아니, 눈물이 목에서부터 울컥 쏟아지는 걸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정수가 밉지는 않다. 우리는 서로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아내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의 얼굴도 떠올렸다. 대화를 많이 하진 않더라도 우리 가족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얼굴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한 번 보드에 곡선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숫자를 적었다. 밑져야 본전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 없다. 어쩌다 보니 대망의 마지막 게임이었다. 상대는 장발이었던 잘생긴 청년이다.등에 땀이 삐질삐질 차올랐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털보가 힘차게 외쳤다.
"가위바위보!!"
건물에서 나오니 벌써 태양이 아침을 알리는 고도로 떠올라 있었다. 밤새 눈을 찌르던 조명과는 다르게 포근한 햇살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모두 긴장감과 피로에 쩔어 좀비 같은 모습이었지만 표정은 사뭇 달랐다. 얼떨떨한 표정의 사람들 사이로 지치지만 기뻐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 망연자실한 표정의 사람들은 이따금 건물의 닫힌 문들 다시 두드리거나 땅을 치며 화를 내기도 했다. 물론 아무런 응답도 없었지만 말이다.
"엿 먹어라!!!"
갑자기 한 사람이 하늘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며 욕설을 퍼부었다.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털보가 말했던 하늘 위의 시청자들은 신일까, 아니면 외계인일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햇빛을 즐기던 정수와 나는 눈을 마주치자 마자 서로를 향해 씨익- 웃었다.
다음 동창회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