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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라 Oct 21. 2023

열역학 제 0법칙

<김자라 단편소설>

*열역학 법칙 시리즈는 제 0법칙 ~ 제 3법칙 총 4편으로 업로드 됩니다.


열역학 제 0법칙,


물리 선생은 칠판에 그렇게 적고는 두 손을 탈탈 털었다. 햇볕의 아지랑이를 따라 분필 가루가 춤을 췄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귀에서는 물리 선생의 나른한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에.. 열역학 제 0법칙은 온도가 다른 두 물체가 서로 열평형을 이룬다는 것에요. A와 B가 서로 열평형을 이루고, B와 C가 열평형을 이루면, A와 C도 열평형을 이루게 되는 거죠.."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왼쪽 팔을 뜨겁게 달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식곤증에 몸을 맡기고 진동 운동을 하고 있었다. 여름 방학이라 보충 수업만 들으면 된다고는 하지만, 물리2 수업을 점심 시간 직후에 잡아두다니. 어떤 선생이 시간표를 짰는지 정말 악독하다.


재생지에 인쇄된 프린트물이 실시간으로 빛을 받아 누렇게 바래고 있었다. 아무리 우등생이라고 해도 저 두서 없는 물리 선생의 수업을 들을리가 없다. 어차피 시험 점수를 좌우할 이 종이 한 장을 받는 것이 이 수업의 목표이다.


고래를 내려 종이를 바라보니 유난히 햇볕에 반짝이는 부분이 있었다.



A~B Λ B~C ➡️C~A



각 항의 알파벳끼리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공식의 알파벳 위에 작은 메모를 끄적였다. A, 연지원. B. 권하준 C. 김유나.



왼쪽에서 대놓고 엎드려 자고 있는 하준과 우측 대각선에서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조는 유나를 번갈아 보았다. 하준은 나의 베프이자 유나의 오랜 ‘소꿉친구’다.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3년까지 찹쌀떡 처럼은 아니지만 퍽퍽한 백설기 만큼은 덩어리져 다닌 그들은 ‘소꿉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어느 정도 머리가 컸다고 어릴 때처럼 친구끼리 손을 잡지는 않겠지만 꺼리낌없이 농담을 던지거나 어깨를 툭툭 치는 정도의 스킨쉽은 할 수 있는 사이었다. 어쩌면 엄마들도 알 만큼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손 잡는 일도 예삿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야, 엄마가 빨리 오래, 하고 손목이나 옷깃을 잡아 끌면서.


그러니까 하준과 유나가 손을 잡을 수 있는 사이라면, 하준과 나(지원)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니까, 결국 유나와 자신이 손을 잡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내가 유나를 열렬히 사모하는 문학인이라도 된 것 같지만, 사실 유나에게 반했다고 단순히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생활복 카라에서 풍기는 섬유 유연제가 라벤더 향을 풍기는 것처럼 스며들었다. 나긋나긋하면서 대범한 성격은 소심하면서 조급해하는 내 성격과는 정 반대였고, 그녀의 꼼꼼함은 중단발의 머리가 한 가닥도 삐치지 않도록 매일 고데기를 하고 나오는 것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그 애에게 끌리기 시작한 건 철저한 난제였다.




유나의 학교생활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여름의 초입에 막 들어설 때 즈음이었을 거다, 아마. 아이들은 이미 80퍼센트가 하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날 나는 하준이와 성공적인 중간고사 요격 기념- 물론 성적이 나올 때까지 방심할 수는 없다 - 으로 저녁 시간 내내 소환사의 협곡(게임 League of Legend, aka.롤)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교문을 나서자 마자 하준이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시험 끝났다고 벌써 잔소리가 시작되는건가! 둘 다 긴장했지만 다행히 잔소리의 주제는 중간고사 성적이 아니라 심부름이었다.



“아-, 맞는다. 야야, 먼저 가 있어라. 엄마 심부름 좀 하고 갈게.”


“무슨 심부름인데?”


“그 왜, 내 소꿉친구 여자 애 있잖아 옆 반에. 엄마가 통장 선거 서류 오늘까지 걔네 아빠한테 줘야 한댔거든. 아아! 아까 주고 올 걸.”


나는 하준이에게 대수롭지 않게 함께 가자고 말했다. 하준이 내 원딜(*원거리 딜러, 멀리서 공격하는 게임 포지션)인데, 원딜없는 서폿(*서포트, 체력 회복이나 버프 효과 등이 주인 게임 포지션)이 혼자 뭐하나.


하준이 카톡을 하자 그 여자애는 친구들과 네컷사진을 찍으러 갔다고 답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떨어진 시내로 나갔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그 여자애가 있었다.


“야, 늦다?”


그 애가 하준에게 눈을 흘겼다. 나와는 어색하게 눈 인사를 했다.


손에서 손으로 서류가 전달됐다. 그러는 사이 둘의 손이 살짝 스쳤다. 딱 서로의 온도를 확인할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그 애는 돌아서 제 갈 길을 갔다.


“자 이제 가자! 오늘 안에 골드 무조건 찍는다!”


텁- 하준이 내 뒷 목덜미를 이끌었다. 땀이 슬며시 베어 니오는 날씨에 비해 손이 시원했다.


“야씨, 왜 이렇게 뜨거워? 하어, 너 열기관이야? 하하”


열기관? 그래 열기관. 물리2 시간에 배웠던 열기관. 열 에너지를 역학적 에너지로 변환하는 장치. 그 단어를 듣고 머릿속이 고장났다. 하준의 손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내 목덜미가 뜨거워진 것이었다. 열기관-연지원-열기관-연지원-열기관.


내가 자리에 우뚝 서자 하준이 눈 앞에 손을 붕붕 흔들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내 시야에만 보이는 미확인 물체를 응시했다.


“하준아, 쟤 이름이 뭐라고?”


“뭐?”


“네 소꿉친구. 이름이 뭐라고?”


하준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답했다.


그 미확인 물체의 이름은,


“쟤? 김유나




제 1법칙에서 계속






열역학 제 0법칙. 어떤 계의 물체 A와 B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고, B와 C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으면, A와 C도 열평형상태에 있다.


열역학 제 1법칙.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열역학 제 2법칙. 고립된 시스템에서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점점 증가한다.


열역학 제 3법칙. 절대 영도에서 엔트로피는 0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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