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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라 Nov 04. 2023

열역학 제 2법칙

<김자라 단편소설>

* 열역학 법칙은 0~3법칙 총 4편으로 연재됩니다.



"에.. 이 부분은 수능에는 잘 안 나오지만 사실 아주 재밌는 부분이에요.. 열역학 제 2법칙이라는 것은 말이죠, 에-, 고립게에서는 무질서도(엔트로피 entrropy; 사용할 수 없는 (이미 사용된) 에너지의 양)가 감소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에.. 무질서도는 증가하는 방향만 가능합니다. 실은 여러분의 교실이 점점 어지럽고 무질서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거죠. 허허"



물리 선생은 혼자 큽큽 거리며 입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손으로 막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서늘해졌으나 그것을 느끼지 못한 물리 선생만 신나서 수업을 이어 나갔다. 참.. 순수한 분이었다. 솔직히 학생들보다는 물리를 사랑하는 교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준은 그런 물리 선생이 귀엽다고 좋아했다.



그 계절은 유난히 더웠다. 장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30년 된 낡은 교실에서는 시원찮은 에어컨이 달달거리며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으므로, 선생이나 우리나 손부채로 집중의 동앗줄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내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은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오른쪽 사선에 앉아 긴 머리를 손으로 들고 목덜미에 부채질을 하는 여자 아이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던 유나와 나는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나를 향해 싱긋 웃더니 다시 칠판 쪽을 바라보고 필기를 시작했다. 이미 한참 전 내 짝사랑을 눈치 챈 하준은 또다시 빨간 불이 켜진 내 양 볼을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쳤다. 나는 하준에게 부정할 말도 없어 눈을 흘기고 말았다.



바야흐로 보충 수업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방학도 끝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나는 마지막 수업이 끝난 날에도 어김없이 물리2 개인 과외를 부탁했다. 방학이 끝나면 이대로 유나와 나의 개인 과외도 끝나는 것일지 궁금했지만, '이제 네 도움은 필요없다'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 말은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와아~, 내일이면 드디어 보충 수업도 끝이네! 방학 때 공부말고 딱히 한 건 없지만, 여름이 끝나는 건 좋아."



"그래?" 나는 마음 속으로만 덧붙였다. '나는 아쉬운데..'



"아, 하나 아쉬운 건 있어!"



"뭔데?"



"바다를 못 간 거. 바다를 진짜 좋아해서 매년 친구들이랑 여름에 놀러갔거든. 올해 바다 못 본 거 진짜 아쉽다."



그것 말고도 아쉬운 건 없는지--예를 들면, 나와의 과외 시간은 아쉽지 않은지--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쉬울 것 하나도 없는 시간들이었다. 유나가 주로 들고오는 질문들은 수능이나 내신과는 관계없는 물리 근본적인 질문들이었다. 나의 전공인 물리2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를 들면, '이론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열기관을 실제로 만들 수 있을까' 같은 거. 어떤 주제들은 나도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지만 어떤 질문들은 물리학자나 할 법한 심도있는 질문들이었다.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등장할 때문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했다. 유나는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15cm 작은 화면을 공유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스터디인지 과외인지 모를 이 시간은 서로의 입시 공부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지식은 유희가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다음 날 유나는 나에게 초콜릿 한 박스를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열심히 가르쳐줘서 고마워! 화이팅!'이라고 적힌 포스트잇과 함께.




개학과 동시에 9월 모의고사가 치뤄졌다.

방학 동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와 동시에 수능과 입시 결과를 앞서 점쳐 볼 수 있는 최후의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교시가 끝나자마자 시험지를 작게 접에 가방 맨 아래에 넣었다. 어처피 내일 담임 선생님이 강제로 시킬 테지만 성적이 나오기 전에 가채점을 미리 해서 기분을 상하고 싶지 않았다.


모의고사 날은 청소도 종례도 없는 유일한 날이었다. 아이들은 종소리가 울리자 마자 가방을 챙기고 우루루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다. 교무실에 질문하러 잠깐 다녀오니 교실에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어차피 같이 놀 하준도 없어 가방을 천천히 챙겼다. 하준은 이번 주 부터 열린 야구 대회에 나가 시험 응시를 하지 않았다.


오늘은 성장기 청소년들에게 비좁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작은 복도도 이미 텅 비어있었다. 9월 첫 주라 아직 해는 건물에 걸려있을 시간이지만 비어있으니 오히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복도에서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흠칫-!


옆 교실이었다. 혹시 우리 학교에도 귀신이 나온다는 괴담이 있던가? 머릿속 기억을 열심히 굴려봤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소문에 너무 무지한 탓이었다. 두렵긴 하지만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가려고 할 때, 교실 문 사이로 길게 하나로 묶은 머리가 보였다. 아, 김유나.

우선 교실 문 뒤로 숨은 뒤 내가 나서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전두엽을 쪼기 시작했다.


드르륵 - 


그 때 유나가 교실 문을 열고 나왔다. 눈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같은 고3이라는 것만으로도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열기관은 뇌를 과열시켜 생각의 작동을 멈추게 한다.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유나야,"


무슨 말을 하려고, 제발, 제발 생각해 연지원!


"바다 보러 갈래?"






우리는 시내버스 20분, 시외버스 1시간, 다시 마을버스 10분, 도합 1시간 반을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서야 바다에 다다랐다. 해가 가장 마지막으로 지는 서해 바다였다. 해는 졌지만 아직 여명은 가시지 않아 수평선 위로 붉은 노을이 일렁이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바다에 왔지만 교복 더러워질까봐 바다에 들어갈 수도 없고,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시선이 헤매고 있을 때, 유나가 바닷가 쪽으로 달려갔다.


철퍽-!


그 애는 바다를 향해 달려가 모래사장에 주저 앉았다. 주저하는 나를 바라보며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달려가 모래사장에 다이빙했다. 짭짤한 모래가 엉덩이에 들러붙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보다는 별빛이 더 잘 보일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어두워지니 바람이 얼굴을 세게 두드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조금 쌀쌀하지 않아?" 아까보다 몸을 살짝 움츠리고 있는 유나에게 물었다. 혹시 춥다고 하면 교복 마이라도 하나 더 걸치라고 건네 줄 요량이었다.


유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딱 좋아. 가을 바람이랑 바닷 바람, 둘 다 내가 좋아하는 바람인데 지금 함께 불고 있어서."


예쁘다. 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바다도 유나도. 이 모든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영화에서나 소설에서 보면 주인공이 이런 타이밍에 고백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만약 AI였다면, 지금 이 배경과 인물과 줄거리에 고백을 하는 것이 최적의 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낸 시간은 입시를 앞둔 학생들에게는 너무 이단적인 시간이었고, 만약 입시에 실패한다면 후회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고백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저 아이가 지금 이 순간을 언제 기억해도 아름다울 추억으로 남기면 좋겠으니까. 가을 바람과 바닷 바람과, 대화 없이 앉아있던 너와 나. 져버린 석양과 벅차오르는 별과 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열역학 제 2법칙, 엔트로피(무질서도)가 높아진 상태를 다시 엔트로피가 낮아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무질서도는 점점 증가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 나를 고립계가 아닌 계로 만들어주기 전까진.



제 3법칙에서 계속





* 소설 진행의 원활함을 위해 열역학에 대한 설명은 축소/과장 되었을 수 있습니다.


열역학 제 0법칙. 어떤 계의 물체 A와 B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고, B와 C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으면, A와 C도 열평형상태에 있다.


열역학 제 1법칙.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열역학 제 2법칙. 고립된 시스템에서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점점 증가한다.


열역학 제 3법칙. 절대 영도에서 엔트로피는 0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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